단돈 10만 원
양콩읽는 데 약 4분
어둠이 낯선 손님처럼 내려 앉던 어느 밤.
이래저래 하다 보니 퇴근시간을 넘겨서까지 사무실에 있었다.
내친김에 좀 더 버티다가 아예 아이 학원 끝날 시간에 나가서 픽업해 가야지 하고 있는데,
어두운 창밖에서 누가 기웃기웃 하더니 문을 밀고 들어왔다.
아이고.... 몰라보게 야위셨네....
얼마 전까지 아파트 노인회장을 하셨던 윤영감님이시다.
"오늘은 왜 늦게까지 있네?"
자리를 잡고 앉으셨다. 금방 퇴근하기는 틀렸네...
"오늘 집 보러 온 사람 없었어?
나 아는 이가 집 구한다길래 내가 이 부동산 사장 잘 아니 꼭 글루 가라 했는데.."
손님이 몇 분 오긴 했는데 그런 분은 없었다고 해도
"아니야~ 왔을 거야 내가 여기로 가라고 했어.
아무튼 누가 오긴 왔지? 내가 보낸 손님이야."
하셨다.
잠시 말이 끊겼다.
그런데 갑자기 처연한 표정을 지으시면서
"내가 젊을 땐 여기저기 돈도 잘 쓰고 다녔는데
나이 들고 또 요새 간에 이상이 생겨서 치료받으러 댕기고 부쩍 아프니까 아무도 돈을 안 꿔줘.
돈 좀 빌려달라 하면 못 받고 떼일 것처럼 생각되나 봐.
그래서 늙고 병들면 더 서글퍼지나 봐. 내가 이래 봬도 한때 좀 잘 나갔어? "
무슨 말씀을 하고 싶으신 걸까.
휴.... 갑자기 깊은 한숨을 쉬신다.
"좀 전에 슈퍼에서 담배 좀 외상으로 달랬더니 안된다고 손에 든 담배를 채가더라고........"
그러시더니
"아까 낮에 지나갈 때 보니 사람들 많던데
복비도 많이 받았겠네? 나 10만 원만 빌려주... 담주 화요일에 줄게"
아... 그래서 들어오셨구나...
윤영감님이 돈을 빌리러 오신 건 처음이 아니다.
몇 개월에 한 번씩? 잊을만 하면 오셨다.
뉴욕에 살고 있는 딸이 용돈을 보내주는데 아마 날짜 대중이 없나 보다.
'딸이 돈 보내주면 줄게' 라고 빌려갔다가 한참 지나서 미제 초콜릿과 함께 돌려주신 일이 몇 번 있었다.
10만 원, 20만 원, 많아도 30만 원을 넘지는 않았다.
그런데 많은 사람을 상대하고 하루하루가 바쁘게 지나가다 보니 빌려드린 돈을 일일이 기억했다가 돌려받았는지 말았는지 체크하기도 그래서... 또 설혹 약속한 날짜가 지나도록 안 준다 해서 동네 부동산이 돈 갚으라고 보채고 쫓아다닐 수는 없는 일이라서... 몇 번 지난 후에는 현금이 없다고 털어버리기도 했다.
그 뒤로는 다른 데서 빌려 쓰시는지 아니면 딸이 용돈을 제때제때 잘 보내주는지 한동안 나타나지 않으셨다.
그런데 다 저녁 때 다시 돈 이야기 하러 들르시기는 얼마나 겸연쩍으셨을까...
또 현금이 없다고 할까 봐 낮에 손님이 많더라는 이야기까지... 외상 담배 사려다 빼앗기셨단 소리는 아니 들은 만 못했다.
그래서 지갑에서 5만 원권 2장을 빼서 영감님이 앉은 소파까지 걸어가는 몇 초 사이에 참으로 많은 생각을 했다.
그동안 금방 갖다 줄 것처럼 하고 몇만 원씩 몇 10만 원씩 빌려갔다가 나타나지 않은 사람이 얼마나 많았던가...
다시 빌려드리기 시작하면 앞으로 또 수시로 들르시면 어떡하나..
'아 그런데.. 아프시다는데....
그래.... 이제 너무 연로하셨으니 그냥 마지막 용돈 드렸다고 생각해야지...'
하고 건네드렸다.
꼭 갚겠다고 약속한 다음 주 화요일이 지나고 또 그 다음 주 화요일도 지나고....
영감님은 오지 않으셨다.
에이 그래 받으려고 드린 돈 아니었잖아
어차피 용돈 드렸다 생각하자 했으니깐...
10만 원 빌려달라셨으니 얼마나 다행이야...
이거 못 갚으시면 앞으로 빌려달란 소리도 안 하실 거 아냐 오히려 잘 됐지 머.
문득문득 영감님과 10만 원 생각이 날 때마다 애써 합리화를 하며 혼자 웃었다.
아닌 척하면서도 그 10만 원이 아까웠나보다.
그리고
3주가 지난 어느 날 오후,
혼자 앉아 있는데 갑자기 누군가 창을 똑똑 두드렸다.
깜짝 놀라 쳐다보니 윤영감님이 빨리 나오라고 손짓하셨다.
나갔더니 주변을 두리번거리다가 내손을 부여잡고 뭔가를 쥐어주셨다.
5만 원권 2장이었다.
"너무 늦었지? 직원이나 손님들이랑 같이 있을 때 오면
'저 노인네는 밤낮 돈만 빌려가네'라고 할까 봐 이제 왔어. 고마워 "
.......
.......
믿지 못할 것이 많아진 세상이지만 사람을 믿는다는 게 바로 내가 행복해지는 방법이 아닌지,
누군가를 못 믿는 순간 가장 불행해지는 건 바로 '나'가 아닌지...
누군가를 믿을까 말까로 혼자 갈등했던 순간들은 그동안 또 얼마나 많았는지....
나의 어리석고 초라한 잣대로 다른 사람의 깊은 마음과 인생을 저울질한 우는 또 얼마나 많이 범했는지....
단돈 10만 원으로 내가 윤영감님의 남은 인생을 초라하게 격하시킨 건 아닌지...
5만 원권 2장을 받아 든 손이 너무 부끄러웠다.
그래 이제는 그러지 말아야겠다. 다음에 또 빌려달라고 오시면 밝은 얼굴로 민망하지 않게 잘 빌려드려야지~ 슈퍼에서 외상 담배 사려다 빼앗기는 일 안 당하시도록 내가 편하게 빌려 드려야지.
그런데
그럴 기회가 없었다.
몇 달 후 우연히 길거리에서 윤영감님 사모님을 만났다.
윤영감님 잘 지내시냐고 요즘 토옹 안 보이신다고 안부를 여쭈었더니
두 달 전에 가셨어... 간암 말기셨거든...
후회는 참 쓸데없는 감정이다.

댓글4
방방곡곡2023년 11월 2일
중개사님의 착한 마음이 느껴지네요.
그래서 여전히 살만한 세상입니다.
프로엔잡러2023년 11월 3일
아..... 뭔가 먹먹해지면서 반성하게 되는 글입니다 ㅠㅠ
멍뭉2023년 11월 3일
항상 글이 너무 멋집니다!!!!
저희 동네에 양콩님같은 중개사분이 계시다면 매일 들러 상담하고 싶을 정도에요 ㅎㅎㅎ
붇옹산2023년 11월 3일
헐..간암말기라니 정말 인생사 부질없네요 세상 하루하루를 잘 살아야 할 것 같은 글입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