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 임차인의 마지막 이사
양콩읽는 데 약 3분
"대표님이랑 내가 벌써 10년 넘었지?
이사 갈 때마다 다 알아서 해줘서 아주 편하고 고마웠어. 언제 신세 갚으리다."
평소 점잖으시던 분이 그날따라 유독 넉살이 좋았다.
10여 년 전, 우연히 방문해 월세 계약을 맺은 게 첫 인연이었다. 그 후로 2년 혹은 4년, 집을 옮길 때마다 어김없이 나를 찾아왔다. 집을 보여주면 늘 한 번 쓱 둘러보고는 바로 결정했다.
"아, 됐어! 어련히 알아서 좋은 집 보여줬겠어? 좋아 좋아."
처음 몇년은 어디선가 양계장을 한다며, 이따금 닭 몇 마리를 손질해 들고 와 사무실 앞에서 멋쩍게 쥐여주고 가곤 했다. 그 후 양계장이 잘 안되어 지방에서 양파 농사를 지을 때는 주말마다 올라와 양파 50개들이 두 자루를 사무실 앞에 풀썩 내려놓았다. 장아찌라도 담가 먹으라며 웃던 얼굴은 항상 정겨웠다.
그러다 만기 시점에 집주인이 집을 팔아달라 하여 매매계약을 체결했다. 이번에는 전셋집을 구해달라 하기에 아 드디어 목돈이 좀 마련되어 월세살이를 면하시는구나 반가워 새 전셋집을 찾아 계약해드렸다.
그리고 어느 날 점심 무렵, 대출 상담사를 불러 전세자금 대출을 신청하러 사무실에 들르셨다. 이삿짐센터 견적까지 함께 챙기느라 두 시간 남짓 머물렀는데, 그날은 유독 이런저런 속내를 털어놓으셨다.
하는 사업마다 생각처럼 잘 풀리지 않는다는 이야기, 지금 함께 사는 사람은 재혼(사실혼 관계)인데 일이 안 풀릴 때마다 미안해서 마음이 두 배로 무겁다는 이야기, 나더러 혹 부부 사이에 틈이 생겨도 웬만하면 참고 양보하며 살라는 당부에다 새 사람을 만나 살아도 크게 다를 것 없고 오히려 첫 배우자가 더 가족 같을 때가 있다는 속 깊은 고백도 덧붙였다.
모든 일을 원스톱으로 마친 뒤, 문을 나서며 털털하게 웃으셨다.
"오늘 내가 귀찮게 해드렸네. 2년 후에는 집 사주쇼. 이제 이사 다니기도 귀찮네……."

그리고 이틀 뒤.
새로 이사 들어올 분이 집 상태를 한번 더 보고싶어 해 전화를 걸었다. 신호는 가는데 받지 않았다. 해질녘이 되어 다시 걸어도 묵묵부답이었다. 부재중 전화가 찍혔을 텐데 이상하다 싶어 사모님 번호를 찾아 눌렀다.
"사장님이 전화를 안 받으셔서 연락드렸어요."
수화기 너머로 짧은 침묵 끝에 어두운 목소리가 돌아왔다.
"네…… 안 받으실 거예요. 돌아가셨어요……."
사무실에서 웃으며 나간 바로 그날, 공사 현장에서 사고를 당하셨다고 한다.
삶에 깊은 영향을 끼칠 만큼 가까운 지인은 아니었지만, 그분의 갑작스런 부재는 가슴 한구석에 파문을 일으키기 시작했다. 한 사람의 삶 한 귀퉁이를 동행하며 그 안의 고뇌를 엿보았고, 그가 건넨 소박한 정을 나누어 가졌기 때문일 것이다.
바쁘게 일하다가도 문득 '아, 그분이 떠나셨지' 하는 생각이 스치면 하던 일을 멈추고 숨을 골랐다. 사람에 따라, 관계에 따라 죽음이 남기는 울림은 참 다르다는 걸 새삼 깨닫는 시간들이었다.
뒤늦은 후회도 밀려왔다. 언젠가 월세가 밀렸을 때 임대인의 독촉에 못 이겨 살짝 짜증섞인 목소리로 전화를 걸었던 기억, 살던 집마다 내가 매매를 성사시키는 바람에 원치 않는 이사를 해야 했을 때의 번거로움…… 그러나 늘 군말없이 양보하고 맞춰주셨던 모습이 떠올라 가슴 한쪽이 아렸다.
그러나 먹먹함도 잠시, 남겨진 사실혼 배우자와 따로 사는 자녀들 사이에서 임차권 승계 문제를 서둘러 정리해야 했다.
우리 민법상 사실혼 배우자는 일상가사대리권은 인정되지만 상속권은 없다. 다만 주택임대차보호법(제9조)에서는 주거 안정을 위해 사실혼 배우자의 임차권 승계를 예외적으로 인정하고 있다.
-상속인이 함께 살고 있던 경우: 민법상 상속인이 승계한다.
-상속인이 따로 살고 있던 경우: 함께 살던 사실혼 배우자와 2촌 이내의 상속인(자녀 등)이 '공동으로' 승계한다(제9조 제2항).
-상속인이 아예 없는 경우: 함께 살던 사실혼 배우자가 단독으로 승계한다(제9조 제1항).
이처럼 임차인에게 따로 사는 자녀(2촌 이내의 비동거 상속인)가 있다면 사실혼 배우자는 자녀들과 임차권을 공동으로 승계하게 되므로, 임대차보증금 반환청구권 역시 법적으로 나누어 갖게 된다.
만약 승계를 원하지 않는다면 사망 후 1개월 이내에 임대인에게 반대 의사를 표시해 승계를 포기할 수도 있다(제9조 제3항).
이번 사례에서는 사실혼 배우자 외에 동거 상속인이 없었으므로, 비동거 상속인인 자녀들의 전원 동의를 받아 사실혼 배우자 단독 명의로 계약서를 변경하여 깔끔하게 마무리했다.
고인은 생전에 전세금의 80% 대출을 신청해둔 상태였다. 그런데 사모님은 대출이 필요 없다고 하자, 대출 상담사가 고개를 갸웃하며 혼잣말처럼 말했다.
"이상하네요. 며칠 전 그분은 80%를 다 받아도 잔금이 부족하다며 마이너스 통장까지 물어보고 가셨는데…… 사모님은……."
사람 일은 참 알 수가 없다.
우리가 그 삶의 깊이를 다 알지 못하는 사람도, 일상에서 수없이 얽혀 살아가던 사람도 어느 날 연기처럼 사라진다.
그러니 한 치 앞도 내다볼 수 없는 인생에서, 하루하루 건강하고 무탈하게 살아가는 것보다 중요한 것은 없다.
누구나 마음속에 크고작은 짐 하나씩을 얹고 살아가기 마련이지만, 살아 숨 쉬는 오늘이야말로 가장 귀하고 다정한 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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