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파트사우루스

너나 잘해

양콩읽는 데 약 3

서울 잠실에서 70대 부부가 내려왔다.

사업차 미국을 자주 드나들던 남편이 중병을 앓게 되어 공기 좋고 조용한 곳으로 요양 겸 이사를 온 것이다.

와서 살아보니 정도 들고 건강도 많이 회복되었다고 좋아했다.

이분은 자식 사랑이 유난했다. 오다가다 사무실에 들를 때마다 입에 침이 마르게 아들 자랑을 했다.

서울 강남에 사는 큰 아들, 둘째 아들이 얼마나 돈도 잘 벌고 효자인지, 그리고 그 며느리들이 또한 시부모에게 얼마나 지극 정성인지...

그러다 몇년 후 남편이 세상을 떠나고 할머니만 남게 되었다. 혼자 된 후에도 틈만 나면 들러서 아들 자랑 며느리 자랑을 했다. 나는 바쁘다는 핑계로 시어머니나 친정엄마한테 제대로 못하는데...저절로 반성됐다.

작년 가을부터 집을 팔아달라고 했다.

아들들이 홀로 되신 어머니를 모시겠다고 집을 팔고 합가하자고 성화란다. 집을 내놓으면서도 세상에 둘도 없는 아들 자랑 며느리 자랑에 시간 가는줄 몰랐는데, 시세보다 조금 높게 내놓다 보니 팔리지 않았다.

어느날 퇴근 준비를 하려는데 슬그머니 문을 밀고 들어오더니, 급히 돈 쓸 데가 있으니 20만원만 빌려달라고 했다. 이틀 후에 꼭 갚겠다고 했는데 2주 쯤 후에 갚았다.

다시 1주쯤 후에 와서 50만원만 빌려달라고 했다.

돈 잘 벌고 살가운 아들 며느리들이 있는데 왜 자꾸 돈을 빌려가시지? 의아했다. 그런데 역시 이틀 후에 갚겠다던 약속과 달리 차일피일 미루더니, 어느 순간부터 사무실을 피해 멀리 돌아가거나 사무실 앞을 지나가더라도 모자나 외투로 얼굴을 가리고 잽싸게 지나친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알면서 모른척 했다. 돈 50만원에 사람을 피해다녀야 하는 70대 중반 인생과 맞닥뜨리는게 더 불편했다.

피해다니기를 한달쯤 하던 어느 날 불쑥 들어오더니 집이 팔리면 돈을 갚겠다고 했다. 손에는 부침개 한 접시와 김치 한 보시기가 들려 있었고 집값은 급매로 내려왔다.

직감적으로 뭔가 문제가 생겼구나 했는데 어느날 대부업체에서 전화가 왔다.

'000씨가 집을 내놓았다고 하던데 확실히 내놓은게 맞느냐, 언제쯤 팔리냐'고 물었다. 등기부를 열어보니 기본 근저당권 외에 대부업체가 설정한 내역도 있었다.

나는 이 집을 팔아야 내 돈을 갚을 수 있겠구나 생각했다. 다행히 쉽게 매수인이 붙어 매매계약 일자를 잡았다. 계약금 선금을 미리 송금하려고 했더니, 그냥 계약 시에 받겠다, 그리고 계약금은 반드시 수표로 찾아오라고 했다. 통장 거래를 못하는 거 보니 확실히 문제가 생긴 게 맞다.

계약 시간은 지난 주 수요일 오전 11시로 잡혔는데, 그날 오전 7시 반에 할머니가 전화를 했다.

친척 상을 당해서 급히 지방으로 내려가야 하니 계약을 미루자고 했다. 그리고 다시 어제 낮 3시로 계약 시간을 잡았는데,,,,, 오전내내 할머니 전화기가 꺼져 있었다. 또 깨지는 건가? 불안함이 엄습하는 가운데 매수인이 예정보다 빨리 도착했고 가까스로 통화된 할머니는 거의 죽어가는 목소리로 말했다.

내가 몸이 너무 아파. 못 움직이겠어

나는 계약을 깨야겠다고 생각했다. 집을 팔고 싶지 않으신 거다.

그동안 온동네방네 아들 자랑을 해댔는데 그렇게 세상 없는 효자라는 큰아들놈은, 불경기에 빚더미에 앉게돼서 어머니를 보증인으로 세워 빌려 쓴 사채 때문에 어머니 집에 근저당이 설정됐다. 또 성격은 지랄맞아도 똑똑하기로 소문났다는 둘째놈은 친구한테 돈을 빌려쓰고 안 갚는 통에 어머니 통장에 압류까지 걸렸다.

아들들은 어머니 혼자 사는게 안쓰러워 집에 모시려는 게 아니라, 어머니가 깔고 앉은 집을 팔아서 빚을 조금이나마 청산하려는 거다. 이것은 늙은 어머니의 선택 사항이 아니고 어쩔 수 없는 수순이었다.

첫번째 계약을 어긴 뒤 두번째 계약 시간을 잡아놓고 주말내 생병이 난 할머니는 집마저 팔아버리면 이제 어디로 가야 하나 궁리에 궁리를 더하다 그만 몸살에 급체...혼자 집에서 온 손가락을 다 따서 체기를 눌렀다.

나는 매도인이 환절기에 심한 몸살이 걸린 듯 하니 다른 날로 다시 잡자고 은근히 유도했으나, 매수인 부부는 일부러 시간 내 왔으니 기어코 계약을 하고 가겠다고 고집을 부렸다. 어쩔 수 없이 기다린다고 전했더니 30분쯤 후 매도인 할머니가 수척해진 모습으로 나타났다.

계약서를 작성했고 수표로 들고 온 계약금도 받았다.

매수인이 돌아간 후에 매도인 할머니는 봉투에 50만원을 담아서 내놓았다.

두달 전에 빌려준 돈을 집을 팔아주고 받았다.

하나도 기쁘지 않았다. 왜 부모들은 자식들을 위해 마지막 남은 재산까지 처분하고 남은 인생 한 몸 누일 곳을 걱정해야 하는가.

퇴근해서 남편에게 말했다.

혹시 늙어서 혼자 남게 되거든 애들이 손 벌려도 다 주지 말고 욕심껏 짊어지고 살아.

바보같이 애들한테 다 뺏기고 의식주 걱정하지 말고!

남편이 말했다.

너나 잘해!

난 잘 할 수 있다. 시집 장가 보내면 1원 한 장도 안 줄 것이다!

다 짊어지고 갈 것이다.

댓글 8

  • 호잇 · 2026년 5월 27일

    슬프네요~ 짠하기도하고 자식농사잘짓는게 중요하다 했는데 각자의 삶을 잘 짊어지고 사는게 중요할수도 있겠어요

  • 방방곡곡 · 2026년 5월 27일

    최고의 노후준비는 자식 농사라고 하더라고요. 마음이 아프네요

  • 하놩 · 2026년 5월 28일

    ㅠㅠ짠하네요..마음이아픈 것 같아요 글만읽어도 찡

  • 눈사라밍 · 2026년 5월 28일

    진짜..이런글은 보기만해도 마음이 그렇네요..

  • 도로롱 · 2026년 5월 29일

    노후에 무시당하지 않기 위해서 지금부터라도 열심히 살아야하는 것 같아요 자식에게 손벌리지 않게끔...

  • 부동산입문 · 2026년 5월 29일

    ㅠㅠ참 슬프네요 ㅠㅠ정말 노후 준비는 .. 확실하게 ㅜㅜ자식에게 부담 되지 않더록요

  • 말차우유 · 2026년 5월 31일

    그 할머니 마음을 누구보다 잘 아시니까 사장님도 보면서 같이 속상하고 더 미안하셨겠어요ㅠㅠ

  • 스위티자몽 · 2026년 5월 31일

    사장님 글에서 할머니를 향한 진심 어린 애정과 따뜻한 온기가 그대로 전해져서 더 뭉클하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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