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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억 연봉의 저소득층과 150달러의 나무집

엘레이맘읽는 데 약 3

최근 미국에서 화제가 된 노숙인이 지은 나무집

미국에 오기 전까지 필자는 노숙자에 대한 개념이 크게 없었다. 서울역에 가면 볼 수 있는 사회의 가장 취약계층, 혹은 사업에 실패해 거리로 내몰린 사람 정도의 생각만 갖고 있었던 게 사실이다. 하지만 미국에 온 이후로는 이들에 대한 생각을 떨칠 수가 없다. 미국의 자본주의 시스템 아래에서는 누구나 노숙자가 될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들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 원인은 개인의 나태함이 아니라, 노동의 가치를 갈수록 짓누르는 구조적 결함에 있다.

한국에서 연봉 1억은 한때 성공의 지표였으나, 이곳 LA에서 4인 가족이 정부 지원을 신청할 수 있는 저소득층 기준은 62,000달러(약 9,000만 원)다. 안전한 동네의 2베드 렌트비가 3,000달러를 넘는 현실을 생각하면, 연봉의 반 이상이 주거비로 사라지는 셈이다. 미국의 주택 가격은 2000년대 초반 이후 실질 임금 상승률의 두 배 이상 속도로 올랐다. 임금이 아무리 올라도 자산 가격 상승을 따라잡지 못하는 구조 속에서, 해고 한 번은 곧 거리로의 추락을 의미한다. 노숙은 게으름의 결과가 아니라, 이 시스템이 예정해 둔 낙오의 자리인 셈이다.

이 냉혹한 현실의 끝에 LA 도심 안에는 '스키드로(Skid Row)'라 불리는 지역이 있다. 여행객조차 절대 가지 말라는 경고를 받을 만큼 위험하게 여겨지는 이곳은, 보도블록 위에 세워진 텐트들이 끝없이 이어진 대표적인 노숙자 밀집 지역이다. 노인과 어린아이 할 것 없이 집을 잃은 수많은 사람이 모여 살고 있지만, 집을 잃었다고 해서 그들이 한순간에 범죄자가 되는 것은 아니다. 이들이 잃은 것은 '집'이지, 그들의 '존엄'이 아니다.

LA시 안에 위치한 노숙인의 성지 스키드로

최근 노숙 생활을 하던 중 스스로 집을 짓고, 나아가 같은 처지의 노숙인들에게 그 집을 만들어 판매하기까지 한 오스발도의 이야기는 그 자체로 하나의 논쟁이다. 일부는 그가 공공 부지를 무단으로 점거해 사유 공간을 만든 불법 행위자라고 말한다. 틀린 말은 아니다. 하지만 나는 그 판단이 지나치게 법적 잣대에만 치우친 것이 아닌가 싶다.

폐지와 판넬을 주워 지은 그의 집 안에는 침대와 TV, 심지어 에어컨까지 갖춰져 있다. 옆 건물의 허락을 받아 전기를 끌어오고, 매일 아침 먼 곳에서 물을 길어와 정돈하며 사는 그의 모습은, 범법자의 그것이라기보다 어떻게든 존엄하게 살아남으려는 한 인간의 몸부림에 가깝다. 법이 그를 불법으로 규정하기 이전에, 이 사회가 먼저 그에게 합법적으로 머물 수 있는 땅을 제공했는가를 물어야 한다. 그 질문을 생략한 채 내려지는 '불법' 판정은, 결국 시스템의 실패를 개인의 죄로 전가하는 것에 불과하다.

노숙자에게도 인권이 있음을 느끼게 해주는 나무집의 내부

LA는 수십 년간 단독주택 중심의 엄격한 용도지역제(zoning)를 유지하며 저가 주택 공급을 사실상 틀어막았다. 그 결과 수요는 넘치는데 공급은 제한된 시장에서 집값과 임대료는 폭등했고, 저소득층은 갈 곳을 잃었다. 정부는 이 구조적 결함을 바로잡는 대신, 올림픽과 월드컵 같은 대형 행사를 앞두고 노숙인들을 시야 밖으로 밀어내는 행정 명령을 반복한다. 문제를 해결하는 것이 아니라, 문제가 보이지 않도록 숨기는 것이다. 그들의 거처를 마련하겠다며 쏟아부은 4,100억 원의 예산이 결국 무용지물이 된 것도 같은 맥락이다. 노숙인을 위해 마련된 호텔은 이름만 호텔일 뿐, 강제 수용소라 해도 무방할 만큼 강력한 규율을 요구했다. 인권을 가진 존재가 아닌 처리해야 할 문제 덩어리로 바라본 시선이 설계한 공간이었기 때문이다. 견디지 못한 이들은 결국 그 호텔을 등지고 거리로 되돌아갔다. 규율이 강요되는 방보다, 불편하더라도 스스로의 존엄을 지킬 수 있는 거리를 택한 것이다.

이 씁쓸한 풍경 위로, 나는 몇 년 전 캄보디아 프놈펜에서 목격했던 장면이 겹쳐 보였다. 부유한 동네 한복판의 비위생적이고 위험한 환경 속에서 살아가던 아이들과 그 가족들의 모습이었다. 국가가 그 부지에 고급 주거지를 짓기로 결정하자, 아무런 사전 고지도 없이 하루아침에 길 밖으로 쫓겨난 그들에게는 앞으로의 삶에 대한 아무런 기약이 없었다. 당시 나는 그것을 빈곤 독재 국가의 특수한 비극으로 이해했다. 그러나 인권의 최후 보루라 믿었던 미국에서, 동일한 논리가 보다 세련된 행정 언어로 포장된 채 반복되고 있었다. 캄보디아의 강제 철거와 미국의 노숙인 추방 명령은 그 형식은 달라도, 경제적 힘이 없는 사람에게 '여기 있지 마라'는 메시지를 전달한다는 점에서 본질적으로 같다.

프놈펜에서 흔히 볼수 있는 판자집

결국 오스발도의 150달러짜리 나무집은, 세계 최대 부국이 만들어 낸 역설의 상징이다. 이 나라의 실패는 가난 그 자체가 아니라, 일하고 노력해도 집을 가질 수 없도록 설계된 구조에 있다. 우리는 이제 개인의 불운에 대한 동정을 넘어, 다음 질문을 던져야 한다. 주거를 삶의 기본권이 아닌 투자 자산으로 다루는 한, 이 시스템에서 다음 차례는 누구인가. 오스발도의 이야기가 남의 일처럼 느껴지지 않는 이유가, 바로 거기에 있다.

사진 출처 : 인터넷 화면 갈무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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