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개사가 쉬운 계약을 쉽게 안 쓰는 이유!
양콩읽는 데 약 4분
중개 일을 하다 보면 남들은 별문제 아니라며 쉽게 쓰는 계약인데
나는 유독 한 번 더 설명하고, 한 번 더 확인하고, 경우에 따라서는 아예 손을 안 대는 계약들이 있다.
대표적인 것이 묵시적 갱신 상태의 계약이다.
10여 년 전의 일이다.
임대인이 집을 팔려고 임차인에게 전화를 해서 이사 나가달라고 했더니,
임차인이 알겠다 했다며 팔아달라는 연락이 왔다.
나는 그 말을 믿고 매매를 진행했다.
그런데 매매계약이 체결된 지 보름쯤 지나, 임차인이 사무실로 전화하여 강하게 항의했다.
'임대인이 전화할 당시, 본인은 이미 만기가 조금 지나 묵시적 갱신 상태였다.
묵시적 갱신이면 그냥 2년 더 살 수 있는 것 아니냐!
당시 본인은 그런 권리가 있는 줄 몰랐다가 이제야 우연히 알게되었다'며
'왜 중개사가 설명해주지 않았느냐.
그 사실을 미리 알았다면 굳이 이사를 안 나가고 계속 거주했을 것'
이라는 이야기였다.
거의 모든 계약이 그렇지만
임대인과 임차인, 혹은 매도인과 매수인간에 쌍방으로 이미 합의가 된 후 연락이 오는 경우에는,
그 결과에 따라 진행하게 된다. 우리 법은 당사자간의 합의 이력을 중요하게 판단하기 때문이다.
만약에 합의한 부분에 대해 의구심이나 궁금증이 있을 경우에는,
미리 정보를 조회해 보거나 중개사에게 문의하여야 한다.
그런데 서너 차례 집을 보러 갔을 때도, 그리고 매매계약을 진행한다고 연락할 때도 아무 말이 없던 임차인이 뒤늦게 항의를 해서 곤란했던 기억이 있다.
그 뒤 임차인은 같은 단지 안으로 이사를 나갔고
한동안은 길에서 마주쳐도 아는 척조차 하지 않더니,
2년쯤 지나서는 언제 그랬냐는 듯 웃으며 찾아와 아파트를 매수하였다.
지금 생각하면 사람 마음도, 인연도 참 묘하다.
하지만 그 일을 겪고 나서 나는 기준이 하나 더 생겼다.
아무리 임대인과 임차인이 합의했다고 해도,
계약 기간과 합의 시기를 따져본 후 이미 묵시적 갱신이 된 상태라면 반드시 다시 설명한다.
"지금은 묵시적 갱신이 된 상태이고, 묵시적 갱신은 임차인에게 여러가지 권리가 있습니다."
계약의 특징과 장단점을 설명한 뒤에, 다시 합의하라고 한다.
묵시적 갱신은 갱신 합의 기간(계약 만기 2개월 전)이 지나 자동으로 연장된 계약이기 때문에,
같은 조건으로 그냥 2년을 거주하면 된다.
말없이 지나간 계약이기 때문에 조건과 권리는 동일하지만 계약서를 다시 쓰지는 않는다.
물론 2년을 채워 살 수도 있고 계약 기간 중이라도 언제든지 임차인이 해지를 통지하면,
임대인은 3개월 후에 보증금 반환 의무를 진다.
그런데, 요즘은 묵시적 갱신이 됐더라도 전세자금 대출 연장 문제 때문에
임차인이 계약서 재작성을 요구하는 경우가 많다.
그럴 때도 나는 그냥 써주지 않는다.
묵시적 갱신이 된 뒤 다시 계약서를 작성하는 것이 혹시라도,
기존의 묵시적 갱신 상태와 권리에 어떤 영향을 줄 수 있는지에 대한 충분한 검토가 필요하기 때문이다.
쉽게 말해
묵시적 갱신의 권리를 그대로 유지하는 것인지, 아니면 신규계약으로 정리하는 것인지
그 경계를 분명히 짚고 넘어가야 하는 것이다.
모든 계약은 계약서를 새로 쓰는 순간 권리와 의무가 변동될 수 있다는 것을 간과해서는 안된다.
반대로 임대인이 묵시적 갱신이 된 후 뒤늦게 '아차' 하며 계약서를 다시 쓰고 싶다고 할 때도 마찬가지다.
묵시적 갱신이 되었기에 계약서를 다시 쓸 필요가 없음을 분명히 이야기하고,
그래도 쓰고 싶다고 하면 임차인과 직접 통화하여 묵시적 갱신에 대해 정확히 설명하고 진행하라고 한다.
그 법리를 정확히 이해하거나 설명하지 않고 진행된 계약은 반드시 문제가 되어 돌아오기 때문이다.
실제로 중개사가 임차인이 계약갱신요구권을 행사할 수 있음을 설명하지 않아
손해배상 책임이 인정된 판결도 있다. 의뢰인이 묻지 않았더라도 설명해야 할 의무가 있다고 본 것이다.
그렇다면, 계약서를 쓸 필요가 없는 묵시적 갱신 상태에서 계약서를 재작성하면
그 계약은 전혀 다른 새로운 계약이 되는 것일까?
반드시 그렇지는 않다.
묵시적 갱신 요건이 충족된 이후 계약서를 작성했다 하더라도,
특약사항에 묵시적 갱신임을 확인하는 내용이 있다면
여전히 묵시적 갱신 권리가 살아있어 중도해지권도 유효하다.
또한 임차인이 해당주택에서 계약갱신요구권을 행사하지 않은 상태라면,
묵시적 갱신이 끝난 후 다시 계약갱신요구권을 행사하여 2년 더 거주할 수 있다.
하지만 묵시적 갱신에 대한 언급 없이 작성됐다면,
그 계약은 신규 계약으로 해석될 가능성이 높다. 신규계약이 되면 임차인이 행사할 수 있었던 권리가 사라지게 된다는 것을 유의해야 한다. 물론 그것을 정확히 이해한 후 임차인이 동의하고 수용하였다면 결과는 달라진다.
결국 임차인 입장에서는 묵시적 갱신 권리 유지를 위해서는, 계약서를 작성하지 않는 것이 가장 안전하다.
반면 임대인이라면, 계약서를 새로 작성해 중도 해지권을 제한하는 것이 유리할 수 있다.
어떤 계약이든 중요한 것은 계약서를 쓰느냐 마느냐가 아니라,
그 선택이 어떤 결과를 만드는지를 확실히 알고 결정하는 것이다.
중개사인 내가,
쉽게 쓸 수 있는 계약을 쉽게 쓰지 않는 이유는 바로 이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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