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파트사우루스

나는 정말 미안했다

양콩읽는 데 약 3

밤새 잠을 설치고 출근하자마자 어느 임차인에게 전화를 했다.

사실 개인적으로는 최근 여러가지 일들이 나름 잘 풀려 흡족한 상태였다.

그러나 행복을 만끽하고 싶은 틈 사이로 마음을 쑤셔대는 한가지 사건이 있었다.

몇년 전부터 사무실에 한번씩 들러서 전도지랑 빼빼로 과자를 가져다 놓고 가는 개척교회 신도들이 있었다.

한 곳에서 20년을 영업하다 보니 길 가다가도 모르는 사람보다 아는 사람이 더 많은 일상인데, 수줍은 모습으로 빼빼로를 놓고 가는 여성분이 왠지 낯이 익고 나를 잘 아는 듯 했다. 나중에 알고 보니 전세를 계약해준 임차인의 배우자였다.

그러다 몇개월 전 갑자기 찾아와서 몇가지 상담을 하더니 집을 사고 싶다고 했고, 성격상 강권하지 않는 스타일인데도 자꾸 찾아오더니 결국 매수를 결정했다.

계약을 하겠다고 하던 날도 나는 서두르지 말라며 집주인이 만기 때 전세금을 잘 빼줄 수 있는지 미리 동의받고 계약하라고 돌려보냈다. 그 집주인은 수년 전에 친구와 함께 와서 갭투자로 집을 매수하였는데 80대 노모 명의로 등기를 했었다.

임차인은 집주인과 몇 번 통화 후 걱정없다며 매매계약을 체결했는데,

결론적으로 이야기하자면 집주인이 잔금 날 전세금을 못 빼줬고 연락도 거부했다.

잔금 하루 전날 상황이 뭔가 안 좋다 싶어 신중히 고민하라고 했더니 임차인은

'그래도 집은 매수하겠다, 대출을 풀로 받아서 일단 월세라도 놓고 있다가 살고 있는 집 전세금을 반환받게 되면 그때 입주를 고민하겠다.' 고 했다. '다만 그러려면 매매잔금 중 3000만원이 부족한데 돈 구할 곳이 없으니 중개사님이 좀 빌려달라....'

그런 무모한 대납은 안 하는데 가끔 나를 건드는 것은 '안타까움'이다.

결국 월세를 놓아서 보증금을 회수하기로 하고 대납을 해주었다.

대납을 해주면서 집주인한테 적극적으로 대쉬해서 일을 잘 해결하라고 구체적인 플랜을 짜주었는데도, 알아서 하겠다고 차일피일 미루더니.... 결국 2달 후 집주인이 파산신청을 했다는 통지가 날아왔다.

젊은 아들이 노모 명의로 집을 사서 중간에 전세가가 오르니 전세금을 최대치로 받아서 썼는데 그 후 다시 매매가, 전세가가 하락하니 모르쇠 하고 있다가 노모를 개인회생 파산신청 해버린 것이다..

나쁜 놈! 너는 다 계획이 있었구나.

그럼 세입자가 다른 집을 못 사게 하고 그 집을 세입자가 인수하도록 사전 조율을 했어야지.

임차인은 한번 들러서 간단히 소식을 전해주고 간 뒤에 연락이 없었고,

그 즈음이 개인적 일로 바쁜 기간이라 나는 미처 그 집일에 못 쓰고 후딱 몇개월이 지나갔다.

그러다 가족들과 외식을 하던 어느 날, 아주 문득 그 임차인이 생각났다.

어떻게 되었을까... 아 이제 보니 빨리 월세도 맞춰줘야 하는데 제대로 신경을 못 썼네...

임차인은 어떻게 지내고 있을까.

새로 산 집은 세가 안 빠져서 대출 이자랑 관리비를 내느라 힘들테고,

살고 있는 전셋집은 나쁜 집주인이 파산신청 해버려서 이중고에 시달릴 그 사정이 너무 안타까웠다.

그런데 나는 내 일이 바쁘다고 그 사실을 까맣게 있고 즐겁게 보내고 있었구나.

다음날 아침 일찍 출근하자마자 임차인에게 전화를 했다.

잘 지내느냐고...

나는 정말 미안했다.

그랬더니 파산 절차가 진행되고 있고 집주인을 전세사기로 엮을 수 있는지 경찰서도 다녀왔는데 별 소득이 없다는 것과 마지막으로 중개사님께 빌린 돈을 빨리 못 돌려드려서 죄송하다는 이야기를 했다.

그래서 나는 말했다.

다른 사람 생각은 마라.. 내가 여러가지 일로 바빠서 고통을 함께 하지 못해 미안하고 집주인놈(?)은 명의신탁에 관련한 내용으로 손해배상을 받을 수 있도록 내가 한번 방법을 찾아보겠다.

그러면서 문득 생각나는 어느 에세이 글귀를 풀었다.

'인생에는 사계절이 있는데 딱 지금이 1월이 되었다고 생각해라. 모든 것이 답답하고 암담해 보이지만 얼음이 녹으려고, 그래서 어디선가 꽃이 피려고 마지막 추위가 몰아치는 거다 생각하고 스트레스를 받지 말라.

교회를 열심히 다니는 당신한테 이런 말 하는 게 좀 어불성설일 수도 있지만, 중개업을 오래 하다 보니 사람 사는 모습이랑 우연과 필연의 차이가 보이더라. 앞으로 모든 일이 잘 풀릴테니 힘내라'

하고 끊었다.

사실 사람 사는 건 다 거기서 거기다.

오늘 최고로 즐거운 일이 생겼다고 항상 그 상태가 유지되는 것은 아니고,

오늘 행복한 우리도 어제까지 항상 좋은 일만 있었던 것은 아니다.

중개업 21년차 어느날,

중개를 완성하고 끝낸 계약 건에 대한 무한한 참견과 적극적 개입을 선언하는 일탈을 하였지만,

그나마 그런 일탈도 내가 중개사니까 할 수 있는 것이라고 생각하려 한다.

전화를 끊고 나니 5분쯤 후에 임차인의 문자메시지가 들어왔다.

나로 인해 잠시나마 그들이 편안해지길...

그리고 그들로 인해 나도 행복한 중개업을 이어갈 수 있기를~

댓글 22

  • 김다솔이에요 · 2025년 8월 13일

    요즘 정말 젊은 분들도 내집마련이 너무나도 힘든시기인 글같아요

  • 팽오리 · 2025년 8월 13일

    중개업을 하면 별의별 사람들을 다 만날 것 같아요

  • 눈사라밍 · 2025년 8월 13일

    내집마련이라는게 앞으로 점점 더 어려워질것같아서 무섭네요

  • 창조경제 · 2025년 8월 13일

    진짜 너무한사람들도 착한사람들도 극과 극을체험하셨네요

  • 오늘을살자 · 2025년 8월 13일

    중개업도 진짜 힘든일같아요 서로의 요구를 절충해야하고 조건도 잘 봐줘야하니 역시 이런것도 전문가가 필요한건 맞는듯합니다

  • 치킨 · 2025년 8월 13일

    나로 인해 잠시나마 그들이 편안해지기를.. 그리고 그들로 인해 나도 행복한 중개업을 이어나갈 수 있기를.. 정말 멋진말입니다 ㅎ

  • 빅토리아 · 2025년 8월 14일

    아무래도 .. 진짜 ㅠㅠ 너무 한 사람도 있고 ..착한사람도 잇고 ㅠㅠ 별별 사람 다 만날거같아요..

  • 아기새 · 2025년 8월 14일

    진짜 세상에는 많은 부류의 사람들이 있는거 같아요 참 이래저래 중개업도 힘든일인거 같아요 ..

  • 베테랑킴 · 2025년 8월 14일

    별별 사람 다 있죠. 그래도 도움이 필요한분들에게는.. 좋은 도움이 되는거라서 다행입니다

  • 미니멀부자 · 2025년 8월 14일

    정말 많은 인연을 만나는 직업이네요. 그래도 좋은 분들 만나면 보람있을거 같아요

  • 훠이 · 2025년 8월 15일

    저런 사람 만나면 머리가 너무 아플거 같아요 에효..

  • 호우호우 · 2025년 8월 15일

    살면서 저런 사람 만나기 어려울거 같은데 역시나 이상한 사람들 많네요

  • 호라이즌 · 2025년 8월 16일

    경험이네요~ 많은 감정이 들 것 같아요 이 일도 ㅎㅎ

  • 치킨 · 2025년 8월 17일

    살고있는 전세집의 집주인이 파산신청을 하는 바람에 전세금을 못받는 경우가 꽤나있을 거 같아요 ㅜ

  • 스위티자몽 · 2025년 8월 18일

    이거 전세 사기의 일종 아닌가요? ㅜㅜ 3천만 원을 빌려주신 중개사님도 대단하십니다. 쉽지 않은 결정이었을 텐데.

  • 말차우유 · 2025년 8월 18일

    임차인분도 중개사님도 마음이 너무 따뜻하시네요. 세상에는 정말 다양한 사람과 별별 일이 있군요.

  • 호잇 · 2025년 8월 20일

    아고 .. 대단 하신데요 진짜 쉽지 않은 결정인거 같아요

  • 헤일리 · 2025년 8월 21일

    진짜 별일이 다있을 것 같네요..

  • 새우깡 · 2025년 9월 3일

    참 악질한테 걸렸네요.. 그래도 훈훈한 사람을 만나서 다행인거 같아요

  • 와사비 · 2025년 9월 4일

    전세 가지고 질나쁜 장난 하는 사람 참 못된 거 같아요

  • 베키 · 2025년 10월 10일

    선한 마음과 따뜻한 위로에 감동했어요. 복잡한 상황 속에서도 임차인에게 힘이 되어주는 중개사님의 진심이 전해지네요.

  • 펜트하우스 · 2025년 11월 1일

    요즘 중개업에서도 진상 고객이 많은거 같아요 의외로 이런 경우가 있을거 같아요 정말 신개념 전세 사기라고 보여져요 중개사님이 많이 힘드셨겠어요 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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