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파트사우루스

중개와 인연

양콩읽는 데 약 5

s#1

출근길에 고객이 운영하는 화원에 들러 등기권리증을 전해주고 색깔이 예쁜 차를 마시며 꽃구경을 하는데....아파트 몇 개를 관리해드리고 있는 손님이 느닷없이 전화를 했다.

"나 지금 갈 테니까 집 몇 개 보여줘요~"

오후 늦게, 전과 다르게 예쁜 모자를 쓰고 반가움을 담뿍 담은 표정으로 들어온 윤여사님.

"어머 모자 쓰신 모습 처음 봐요~

모자 진짜 잘 어울리셔요~ 예쁘다~~"

"아 맞아 중개사님 모자 좋아하지? 이 모자 예뻐요?

그럼 오늘은 그렇고 내가 모자 세탁해서 택배로 보내드릴게~~"

앗싸~~!

다른 물건은 별로 관심 없는데 모자를 유난히 좋아해서

예쁘고 특이한 모자를 모으는 습관이 있다.

'아....저 예쁜 모자를 주시겠다니 진짜 성격 짱이셔~~'

타 지역에 거주하는 윤여사님은 몇년 전 경매로 잡은 물건 몇 개를 세 놔 드리면서

인연을 맺게 되었는데, 계약 시마다 인자하고 배려심이 좋으셔서 참 배울 점이 많다고 느끼는 60대 아주머니.

들고 나는 임차인들한테도 얼마나 잘 해주시는지, 내가 아는 고객들 중에 단연 톱이었다.

'나도 저렇게 나이 먹어야지.....'

중개보조원과 집을 보고 오시더니 바로 계약하겠다고 해서, 매도인에게 전화해 가격흥정을 하자 매도인이 '내일까지 답주겠다' 고 했다. 계약자가 즉답을 피하고 하루 이틀 미루는 경우에는 부결될 가능성이 높다.

그런데 운여사님이 갑자기 1000만원짜리 수표 2 장을 꺼내더니

'중개사님이 가지고 있다가 계약해줘요!' 하면서 도장까지 맡기셨다.

매듭이 안 지어졌는데 돈을 받아두는 건 나의 중개 방식이 아니다. 단돈 10원이라도 계약 조건에 대한 쌍방 합의가 확실히 이루어진 후에야 전달하게 하고, 그것마저도 중개사인 내가 아닌 소유자 계좌로 송금하게 한다.

수표를 받지 않겠다는 나와 맡기고 가겠다는 윤여사님 설전을 지켜보던 눈치 빠른 중개보조원이 다른 평형을 권했다. 평형 대비 매매가가 다소 높은 물건인데 인테리어가 수준급이라 보여드렸더니 윤여사님은 또 계약하겠다고 했다.

다행히 이 물건은 매도인과 가격 조율이 잘 되어 일사천리로 진행되었다.

계약을 마치고 잠시 환담을 나눈 후 다소 아쉬운 표정으로 일어서던 윤여사님이 말했다.

"내가 집에 가서 모자 세탁해서 택배로 보내드릴게~~"

뒷정리를 하면서 '계약이 참 쉽게도 됐네..뭔가를 계약하고 싶어서 작정하고 오신 느낌이야...' 라고 생각하고 있는데..

중개보조원이 중얼거렸다.

"아까 저 사모님한테 모자 쓰신 거 참 잘 어울리고 예쁘다고 하셨잖아요?

집 보러 가면서 모자를 벗어 보여주는데.. 세상에~~ 머리카락이 많이 빠져서 휑해요~ . 아마 그래서 바로 모자 벗어줄 수가 없어서 보내주신다고 하는 것 같아요,

우울증 걸리셨대요.... 집안에 여러가지 스트레스가 많아서.. 특히 하나뿐인 아들이 결혼한 후 연락이 두절되다시피 해서 삶의 의미가 없어졌다는 말을 넋두리처럼 하시는데... 가슴이 짠 하더라구요. 그래서 대표님 얼굴도 보고 바람도 쐴겸 해서 오신거래요."

마냥 행복해보이고 근심 걱정 없어보이던 분이 어쩌다 우울증까지 걸리셨을까...

보이는 것과 보이지 않는 것의 차이는 얼마나 클까...

생각지도 않은 계약으로 업 됐던 기분이, 모자와 그 미소와 어둠 속으로 사라진 뒷모습 때문에 뭉클해졌다.

윤여사님께 잘 올라가셨냐고 전화 통화하며 어슬렁거리다 보니

사무실 뒷편의 노란 산수유가 눈에 들어왔다.

아이구...언제 폈을꼬... 누군가가 '노오란 아우성'이라고 표현했던 산수유꽃.

고개를 조금만 돌려도 생각을 조금만 바꿔도, 세상은 참 아름답다. 다만 그렇게 고개를 돌릴 만한 여유를 못 가진 것일뿐...

s#2

유난히 분주하던 어느 날, 모자(母子) 로 보이는 남녀가 들어왔다.

훤칠한 30대 중반의 남성과 깐깐해보이는 60대 여사님.

통화 중이라 건성건성 인사했더니 여사님이 대뜸

"가자! 여긴 바빠서 손님 취급을 안하네.."

하고 소리를 버럭 질렀다.

바로 전화 끊고 죄송합니다~ 하고 자세를 낮췄더니

"제일 앞동으로 매매 나온 거 하나 보여주시요"

했다. 앞동에는 4층 하나 있다 했더니

'4층? 4자는 싫은디?' 하고 인상을 찌푸리시길래 구경이나 하시죠ㅡ 하고 가서 보여드렸더니

내려오자 마자 대뜸

"아야 이걸로 계약 하자! 주인 오라 하시요!"

했다. 뒤에 서 있던 남자가 더 어리둥절하여

"어머니! 왜 그러세요. 오늘 이상하시네.."

하며 사무실 밖으로 끌고 나가 한참을 만류했지만 여사님은 다시 들어와 단호하게

"주인 오라 하시요 쓰고 갑시다!" 했다.

매도인을 불러서 바로 계약했다.

그날 밤 자정이 다 된 시각에 그 여사님께 전화가 왔다.

ㅡ 생시(生時) 대보시요!

ㅡ 네?

ㅡ 아무래도 내가 오늘 이상해. 생시 대보시요!

생시를 댔더니 한참 중얼중얼 하더니

ㅡ 아이고 딱이네..오늘 나랑 합이 들었네

어쩐지..거길 그렇게 들어가고 싶드라~

내용인즉슨, 며칠 전부터 찍어두고 보던 단지가 있었단다.

3일 만에 겨우 조건을 맞춰 계약하러 가는 길이었는데,

우리 사무실 앞을 지나다가 갑자기 들어 가보고 싶었다고 한다.

여사님은 심심풀이로 명리학을 공부하고 계시는데,

어떤 일을 하더라도 반드시 그날 일진을 따져보고 하신다나?

아무튼 응대가 마음에 안 든다고 역정까지 내고 원치 않는 층 매물까지 봤는데

어인 일인지 너무 계약이 하고 싶더란다.

계약을 마치고 돌아가는 길에 원래 계약 약속 잡았던 중개사무소에도 미안하다는 전화를 했는데,

운전하던 아들이 계속 어이없어하며 투덜댔다고 한다.

집에 돌아가 뭐에 홀렸나 싶어 뒤척이다가 내 사주를 물어보더니 본인이랑 합이 들었대나 뭐래나...

여사님은 입주해 살다가 약 2년 후 다시 이사 나가셨는데

당시가 최악의 불경기였음에도 불구하고 그 집은 괜찮은 금액에 금방 팔렸다.

잔금 날 중개보수 외에 과일 상자, 애지중지 보살피던 화초와 골동품 도자기, 명화 등을 선물로 가져오신 여사님은, 서울 등 수도권 곳곳에 집들이 여러 채 있는데 이 거래절벽기에 이렇게 금방 팔린 집은 없다면서,

우린 서로 참 잘 맞는 좋은 인연이라고 했다.

또 사무실 자리가 명당자리라며 정신을 집중시키고 맑게 해주어서 계약도 잘 될 거라고, 언젠가 꼭 다시 오겠노라 하고 가셨다.

시작도 마무리도 모두 기억에 남는 인연이었다.

가끔 가족들이 부동산을 하더니 갈수록 비과학적이 돼 간다..라고 재밌어 하기도 하지만,

아무리 애써도 절대 안되는 일이 있고

심드렁해도 기어이 되는 일도 있고

아주 좋은 사람이구나~ 했는데 깊은 상처를 주기도 하고

무심히 일별하고 말았는데 이름만 떠올려도

오래도록 따스해지는 사람도 있고

살아가는 데에는 참 묘한 인연이 존재하는 것 같다.

살면서 나랑 잘 맞는 사람들만 만나며 살 수는 없지만 안 맞으면 원래 안 맞는 관계라서 그러려니...

그도 나도 각자 다른 방식의 삶이 있겠거니 받아들이는 것도 중개업이 가르쳐준 삶의 이력이다.

댓글 17

  • 우린깐부 · 2025년 6월 18일

    글을 읽는데 세상엔 정말 다양한 사람이 많네요~~^^첫번째 사연 할머님은 너무 안쓰러워요~~~밝은 행동 속에 얼마나 큰 외로움이 사무치셨을지~~~ㅠㅠ

  • 집좀사자 · 2025년 6월 18일

    이런 사연들을 읽다 보면, 사주를 믿는 편은 아니지만, 정말 명리학이라는 것이 과학적으로 입증 된 건가 신기하기도 합니다. 우연의 일치일까요?

  • 나안아... · 2025년 6월 19일

    자신의 모자를 선뜻 내어주시는게 얼마나 따뜻하신분인지 알겠어용,,,그래서 괜히 더 마음아픈 느낌이네용,, 이글보고 엄마한테 전화하고 왔어요~~ㅠㅠㅠ

  • 크록스 · 2025년 6월 19일

    나이들수록 돈보단 자식복이 중요합니다

  • 샤인머스캣 · 2025년 6월 20일

    글 읽는 내내 제 마음이 다 쓸쓸했어요.. 세탁해서 준다고 하시는 게 더 속상하네요.. 마음 건강이 제일 중요한데 나중에 얼마나 후회 하시려고.. 저도 부모님께 안부전화 드리고 와야겠어요!!

  • 웃으면된다고생각해 · 2025년 6월 21일

    가족같지도 않은놈들이 꼭 자기 아쉬울때만 가족행세한다 진짜 답도없음 나중에 얼마나 후회하려고 더러는지 있을때 잘해야함

  • 비가오잖아 · 2025년 6월 24일

    양콩님이 좋으신 분이라는 게 오늘도 느껴지네요 글 잘 읽었습니다

  • 베테랑킴 · 2025년 7월 16일

    아.. 글 읽으면서 참.. 맘이 아리네요. 부모님.. 더 챙겨드려야겠어요

  • 훠이 · 2025년 7월 20일

    참..안타까운거 같아요..아들이라는 사람이 왜 그런것인지

  • 치킨 · 2025년 7월 29일

    아무리 애써도 잘 안되는 일들이 있고 심드렁하이 해도 잘되는 일이 있고.. 정말 맞는말입니다

  • 와사비 · 2025년 8월 1일

    사람이라는 게 참 알 수가 없는 거 같아요

  • 눈사라밍 · 2025년 8월 2일

    세상엔 정말 따뜻한사람도 많고 그렇지 못한 사람도 많구나 느끼네요

  • 새우깡 · 2025년 8월 5일

    열길 물 속은 알아도 한 길 사람 속은 모른다고 하죠

  • 호라이즌 · 2025년 8월 7일

    글 잘 읽었습니다 생각이 많아집니다

  • 호잇 · 2025년 9월 7일

    사람마음 알기가 정말 어렵죠 ㅎㅎ

  • 스위티자몽 · 2025년 10월 27일

    뭐든 결정할 때 사주풀이나 점 같은 거 보고 결정하시는 분들이 꽤 많은 것 같더라고요. 어떻게 보면 미신 같으면서도 그 기운이란 게 맞아서 일이 잘 풀리는 거 보면 너무 신기해요.

  • 말차우유 · 2025년 10월 27일

    항상 좋게만 보이시던 윤 여사님께 그런 속사정이 있었을 줄이야. 글을 읽으면서 생각한 건데, 아들 내외 소식이 뜸해지면서 주변 사람들과의 인연을 더 소중히 하고 계신 게 아닐까 싶네요.

함께 보면 좋은 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