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범한 아파트가 '초품아'가 된 씁쓸한 이야기
너구리읽는 데 약 3분

"아니 글쎄 이게 진짜 되더라니깐요, 저희도 모두 놀랐어요."
얼마 전 거래처 A부장과 저녁식사를 하던 중 들은 얘기다. 자신이 입주한 아파트 단지에 초등학교가 들어서게 된 흥미로운 얘기였다. 단지 내에 학교가 생긴다는 게 그렇게 기쁜 일인 것일까.
나는 어렸을 적 걸어서 10분 거리에 있는 초등학교에 다녔다. 등굣길에 친구들과 만나 오순도순 얘기를 하며 걸어가는 것이 즐거웠던 기억이 있다. 현재 아이가 없는 나로서는 단지 내에 초등학교가 생긴다는 것이 얼마나 좋은 일인지 이해하기 힘들었다.
A부장은 웃으며 아이들의 등하교가 안전해지는 것과 함께 아파트 가치가 훨씬 뛴다는 점을 강조했다. 초등학교가 단지 내에 있다는 것만으로 아파트 가치가 뛴다는 것은 처음 알았다. 그것을 일종의 '초품아'(초등학교를 품은 아파트)라고 부른다는 것도 배웠다.
A부장이 살고 있는 아파트는 2021년 비교적 최근 분양된 서울 외곽지역에 위치한 대단지다. 두 단지를 합쳐 약 1500세대이며 각각의 단지마다 입주자대표가 있다. 이 아파트는 처음 분양 당시엔 단지 내 초등학교 개교 계획이 없었다.
현재 이 단지에 살고 있는 초등생들은 걸어서 10분 거리에 있는 학교에 다니고 있다. 주변이 다 아파트 단지라 통학길이 그렇게 위험한 것도 아니다. 당장 아이들을 교육시키기에 큰 문제가 없는 학교다.
A부장 얘기에 따르면 지난해 4월 입주자대표가 반상회에서 선언했단다. 자신이 우리 아파트 단지에 초등학교 개교를 유치하겠노라고. 주민들은 반신반의했다. 교육청이 움직일 리 없다고 여겼다.
이후 입주자대표는 다음 날 바로 옆 단지 대표와 손을 잡고, 1500세대 전체에 공지를 보냈다. "모든 세대가 교육청 아이디를 만들어 주십시오. 가족 구성원 수에 맞춰서 말이죠. 그리고 제게 아이디와 비밀번호를 넘겨주세요."
입주자대표의 계획은 입주자대표단에서 교육청 게시판에 주민들의 아이디로 민원글을 계속 신청해 초등학교 개교를 성사시키겠다는 다소 황당한 생각이었다. 민원글 내용은 '이 단지에 왜 학교가 필요한지 타당성 검토를 다시 해달라'는 내용이다. 만약 1500세대가 모두 참여했다면 평균 구성원 수를 3명씩만 잡아도 4500개의 민원을 요청할 수 있다.
물론 이 요청에 모든 세대가 참여하지는 않았고 아이디를 1개씩만 낸 세대가 많았단다. 그래도 대략 수 백개의 민원 요청을 했을 것으로 추정된다.
처음 한 달간은 민원 요청을 열심히 올렸지만 반응이 없었단다. 그러자 입주자대표는 더 많은 세대가 아이디를 만들어 참여해 달라고 요청했고 민원 요청 보내기에 더욱 열을 올렸다. 그리고 두 달만에 교육청에서는 백기를 들었다.
나중에 단지를 찾아온 교육청 관계자는 "민원이 쏟아지면 어쩔 수 없이 직원이 실사를 나가야 하는 데 도데체 이 단지 사람들이 왜 그렇게 초등학교 개교 요청을 했는지 궁금해서 와봤다"라고 말했단다.
그로부터 1년 뒤, 해당 지역 초등학교 신설안은 교육부 중앙투자심사를 통과했다. 민원 요청글 폭탄 전략이 정말로 먹힌 셈이다. 현재는 공사가 한창이며, 내년 상반기 개교 예정이다. 이 입주자대표는 영웅이 됐고 이후 주민들은 그를 100% 신뢰하고 있단다. A부장은 다시 한 번 "이게 정말 될지 몰랐다"며 밝게 웃었다.
초등학교 신설은 대체로 어떤 과정을 거칠까. 일반적으로 단지 내 초등학교가 들어서기까지는 2~3년 이상의 복잡한 절차를 거쳐야 한다. 먼저 교육청이 학생 수요와 주변 학교의 수용 능력을 예측한다. 신도시나 대규모 단지가 조성될 때, 학령인구(만 6~12세 예상 인구)가 일정 기준을 넘지 않으면 학교 설립이 승인되지 않는다.
그 다음에는 도시관리계획에 학교 부지를 포함시키는 절차가 필요하다. 도시계획위원회 심의에서 학교 용지를 '도시관리시설'로 지정해야 하기 때문이다. 이후 교육환경영향평가, 학교설립심의위원회, 그리고 교육부의 중앙투자심사를 모두 통과해야 최종 승인된다.

마지막으로 지자체 또는 LH, 시행사 등이 부지를 매입·기부하고, 교육청이 예산을 세워 설계를 발주해야 비로소 '학교 신설 사업'이 착공된다. 이 모든 과정을 정상적으로만 진행해도 최소 3년, 길게는 5년이 걸린다. 즉, 게시판에 글을 백 번 올린다고 당장 학교가 지어지는 건 아니라는 얘기다.
아마도 A부장의 동네는 신도시였고 학령인구 조건을 갖췄기 때문에 초등학교 신설 측면에서 유리했던 것 같다. 그래도 불과 1년 만에 이 모든 과정이 민원 덕분에 통과됐다는 점은 매우 드문 사례일 것 같다.
실제로 주민 민원이 행정 결정을 '움직인' 사례를 찾아봤다. 구글 검색을 통해 찾아보니 포항융합산업지구 주민들은 학교 개교 시점을 1년 앞당겨 달라고 요구해 교육청이 일정을 조정한 사례가 있었다. 화성 동탄23초등학교, 울산 다운2지구 초등학교 신설안도 주민들의 청원 이후 교육청이 검토에 착수한 케이스다. 하지만 대부분은 검토 단계에 그쳤고 실제 개교가 결정된 경우는 드물었다.(더 과거 사례를 찾아보면 있을 수도 있다)
부동산 관계자들의 얘기를 들어보면 초품아는 요즘 분양사들의 홍보 전략으로도 많이 쓰인단다. '초품아 예정'이라는 문구로 유혹하는 것이다. 하지만 분양 초기엔 '단지 내 초등학교 예정'이라며 청약 열기를 부추기지만, 막상 입주 시점엔 '교육부 심사 반려로 연기됐다'는 통보가 붙는 경우가 많단다.
또 교육청, 교육부 민원은 대부분 초등학교, 중학교 등 학교 신설 요청 안건이 많다고 한다. 대부분 주민들이 직접 민원을 요청한다. 다른 지역 단지에 학교가 신설되면 "왜 우리 단지는 안되냐"며 항의 민원도 제기된단다.
A부장과 저녁미팅을 마치고 집에 돌아가는 길에 알 수 없는 찝찝한 기분이 들었다. 누군가는 '민원'에 화답한 공공기관이라는 아름다운 사례라고 할 수도 있겠지만 나에게는 주민들의 이기심이 만든 촌극으로 보였다.
이런 사례가 다른 아파트 단지에서도 반복된다면 모두가 민원 요청에만 열중하게 될 수도 있다. 또 세금이 들어가는 공공시설이 특정 아파트 단지의 이익에 맞춰 배치된다면, 그건 공정한 행정도 아니지 않는가. 교육부와 교육청의 존재 이유는 '아파트 시세' 때문이 아니라 '교육'을 위해 존재한다는 것을 모두 명심했으면 좋겠다.
댓글 26
박하맛 · 2025년 10월 19일
진짜 공감돼요
초등학교 신설 얘기는 꼭 분양 홍보용으로만 들리는 경우가 많죠...
결국 교육이 아니라 이익 중심으로 흘러가는 현실이 씁쓸하네요 ㅜㅜ
청라룡 · 2025년 10월 20일
맞아요...아이들의 교육의 장이 어른들의 부동산 홍보용으로 전락하는것 같아서 마음이 아프더라구요 장점도 있겠지만 단점도 명확하게 눈에 보이는데 말이죠
빅토리아 · 2025년 10월 20일
맞아요 진짜 초품아가 .. 아무래도 꼭 아파트 분양에 있어서 너무 중요한 게 되어버린거 같아요
아기새 · 2025년 10월 20일
요즘 아파트 볼떄에 단지내 초등학교를 정말 중요하게 보는거 같기는 하더라구요 .ㅠ ㅠㅠ 아무래도 홍보가 되죠
눈사라밍 · 2025년 10월 20일
초품아가 있다고해서 그곳을 지나가는것도 못하게하는 단지도 많아서 마냥 좋은건가싶어요ㅠ
아아정복 · 2025년 10월 20일
아이들이 있으면 학교는 무조건 필수인거같아여
현맘이 · 2025년 10월 20일
진짜... 초등학생아이가 있는 집이다보니. 안그래야지..하면서도 은근 초품아를 찾게되는거 같아여..
베테랑킴 · 2025년 10월 20일
맞네요.. 이러다가는 민원요청에만 열중하게 될 수도 있을 상황이 오겠네요...
포근포근쿠키 · 2025년 10월 20일
학교가 근처에 있으니까 좋기는 하지만 그게 또 독이 될 수 있는 부분도 많이 있는 것 같아요. 그런데 요즘 아파트가 기본적으로 학교를 많이 품긴 하는 것 같아요.
봄호랑이 · 2025년 10월 20일
아무래도 초품아여야 나중에 가격방어가 되다 보니.. 이런저런 장단점이 많아서 어렵네요...
도기몬 · 2025년 10월 20일
어떤 정책이든 장단점은 어쩔 수 없이 생겨나는 것 같아요.. 사실상 아이 있는 집안에선 너무나도 중요한 문제기도 하죠ㅠ
말차우유 · 2025년 10월 20일
와.. 어떻게 보면 대단합니다. 아무리 민원을 넣고 청원을 넣어도 안 되는 일이 더 많은데, 다수의 민원으로 결국 초등학교가 신설되게 됐다니.. 근데 나중에는 결국 학생 수 부족이 되는 건 아닌지.
스위티자몽 · 2025년 10월 20일
요새 폐교되는 초등학교도 많다고 들었는데 인근에 초등학교가 가깝게 있는 상황에서도 주민들의 힘으로 초품아 단지를 이뤄낸 셈이군요.
미니멀부자 · 2025년 10월 21일
초품아가 인기니 물론 홍보할때 메리트로 쓰이기는 하나.. 이게 다 되는게 아니니 잘 알아보기도 해야겠네요
호잇 · 2025년 10월 23일
아이키우는 집에서는 초등학교의 거리가 정말 중요하죠
펜트하우스 · 2025년 10월 25일
분양받을 곳에 아이가 다닐 학교가 새워지거나 초등학교가 가까우면 훨씬 관심도들이 높은거 같아요
박하맛 · 2025년 10월 29일
괜히 초품아 초품아 그러는게 아닌가봐요 저는 아직 아이가 없지만 저도 초등학교를 품은 아파트를 택할것 같아요
와사비 · 2025년 11월 1일
초등학교가 민원만으로 들어서기도 하고 그러는군요 ㄷㄷ
새우깡 · 2025년 11월 1일
아무리 그래도 원칙과 절차를 지키며 진행해야 뒷 말이 안나올 거 같네요
베테랑킴 · 2025년 11월 1일
그러게요.. 민원 반영도 중요하지만 이러다가 너무 악용?될 수도 있기도 하겠네요..
미니멀부자 · 2025년 11월 4일
그쵸 사실 민원이 들어온다고 다 될것도 아니지만 그 중에서도 원칙 절차 잘 지켜야지만 문제 안 생기는거겠죠
아아정복 · 2025년 11월 7일
아이 있으신분들이라면 무조건이라고 생각하네요
스위티자몽 · 2025년 11월 11일
그러니까요. 민원 넣는다고 초등학교가 신설될 수 있다는 거 처음 알았어요. 근데 저게 오래 유지가 될까요?? 학생수 충족이 될지..
말차우유 · 2025년 11월 11일
역세권도 중요하게 보지만 초품아인지 학군이 어떤지도 엄청 중요하게 본다고 하더라고요. 그런데 이렇게 해서 초등학교가 신설된다는 게 그저 신기합니다.
뽀뽄 · 2025년 11월 11일
주민들의 단합과 열정이 대단하지만, 공공시설의 배치가 특정 단지 이익에 맞춰지는 건 생각해볼 문제네요.
베키 · 2025년 11월 12일
공공시설 배치 공정성, 주민 이기심에 대한 지적에 공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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