계약서 위의 동창
양콩읽는 데 약 2분

오후 4시 40분에 매매계약이 있었다.
매수인은 이 아파트 다른 동에 전세로 살고 있는데 2년 전 계약할 때부터 뭐랄까...좋게 말하면 꼼꼼하고 다르게 말하면 좀 특이한 손님이었다.
첫 방문 시 중개사인 나를 빤히 쳐다보더니
'' 중개사님! 혹시 시간되시면 저랑 상담좀 하시겠습니까?''
진지하게 말하길래 뭐지? 하고 긴장하여 테이블에 마주 앉으니, 이사를 올지 말지 전세로 할지 매매로 할지 상담하였다.
두번째 방문 시도 '혹시 시간되시면 30분 정도 상담좀 하시겠습니까?' 하더니 마주 앉자
LH 조건이 뭔지, 전세자금 대출은 어떤 식으로 받는지...
차분하고 정제된 목소리로 뚫어지게 쳐다보며 남북회담 하듯이.. 거시적 안목으로 수용할 건 수용하고 거부할 건 거부하겠다는 분위기로 대했다. 그런 불편한 상담이 일주일 간격으로 3번쯤 반복되자
뭐야...심심한 손님인가?..진지하게 장난치나?
하던 차에 정말 집을 보았고 전세계약을 하였다.
그렇게 살다가 올초에 큰 평수로 옮기고 싶다며, 전세 만기 6개월 전부터 임대인한테 '만기일 보증금 반환'에 대해 내용증명을 보내겠다고 여러번 찾아왔다.
아무튼 임대인이 집이 안 나가도 만기일에 보증금을 빼준다고 해서 큰 평수 매물을 보았는데 계약금이 5%정도밖에 안 된다고 했다. 잔금일에 보증금과 담보대출 받아서 한꺼번에 치루겠다고 했고 매도인도 동의했다.
그런데 매도인이 이사갈 집을 연이어 알아보고 나니 그쪽에선 계약금 10%에다 중도금까지 요구했다. 그래서 매도인이 9월 중순경에 중도금을 한 3000만원이라도 달라고 요구했다.
매수인은 계약금도 5%밖에 안되는 상황이라 잠시 고민하는 사이, 매도인이 계약서를 훑어보다 공동명의인 매수인 와이프 이름을 보더니
"어? 동창인 것 같은데? 고향이 ○○시 아니에요? 거기 00고등학교 나오지 않았어요? 같은 종씨라 나름 친했는데~"
매수인 와이프는 도장이랑 신분증 보내 위임하고 안 왔는데, 매수인이 학교 이야기를 듣더니 맞다고 했다. 그리고 정적... 급 어두워진 매수인 표정.

매도인은 매수인 부부랑 연령대가 같지만 담보대출도 전혀 없는 상태고 이사갈 집도 대출없이 구매 예정일 정도로 여유가 있었다. 반면 매수인은 계약금도 5%밖에 못 걸 상황... 동창 어쩌고 이야기 나오니.. 그냥 중도금을 9월 중순에 주는 걸로 기재했다.
계약이 끝나자마자 다른 일정이 있어 문을 닫고 쏜살같이 퇴근했는데....아....집에 오는 길, 집에 와서 이것저것 하는 내내 자꾸 매수인이 생각났다. 자존심도 세고 항상 무게 잡고.. 무지 꼼꼼하게 따지기 좋아하던 사람인데... 매도인은 와이프 고교 동창이고..,,,,,앙,.,,참..
매도인 남자가 매수인 와이프의 고교동창만 아니었어도.......그 묘한 기류....동창 이야기가 나오자 급 어두워진 매수인의 표정.
고민하다 결국 매수인한테 문자메시지를 보냈다.

그리고 오늘 출근하니, 매수인이 사무실 밖에서 안쪽을 두리번거리고 있었다
웬일이지? 했더니 전날 중도금이 부족해서 어찌 마련하나 난감해 있던 차에 문자메시지를 받고 너무 고마워서 뭉클했다고...뭐라 마음을 표현할 길이 없어서 들고 왔다며 쇼핑백을 내밀고 쏜살같이 사라졌다.

그렇게 꼼꼼하고 차분하던 남자가 비교우위에 선 와이프 동창 매도인 앞에서 미세하게 흔들리던 모습이 오래 기억되었다.
사람의 마음이란 건 어쩔 수 없이 상대적이다.
어느날은 북풍한설에도 끄떡없는 바위같다가,
어느 날은 봄바람에도 하늘거리는 여린 풀잎같다.
댓글 25
김다솔이에요 · 2025년 9월 17일
전세를할지 매매를 할지라는
고민이 너무부럽습니다 선택사항이없이 요즘은 월세살이를 해야하는데
팽오리 · 2025년 9월 17일
아무리 동창이라도 중도금 대납해주는게 쉽지않았을텐데 대단하네요
눈사라밍 · 2025년 9월 17일
전세랑 매매를 고민하고싶네요 저도ㅠ
오늘을살자 · 2025년 9월 17일
와 진짜 동창이라서 그렇게 해주는것도 대단한것 같은데 씁쓸한 사연입니다 늘 잘 읽고 있습니다
창조경제 · 2025년 9월 17일
하필 와이프의.. 참 체면과 현실 사이에서 힘드셨겠네요
빅토리아 · 2025년 9월 17일
전세랑 매매는 늘 언제나 고민이 될거 같아요 . ㅠㅠㅠ 진짜 .. 엄청나게 씁쓸한 .. 사연이네요
아기새 · 2025년 9월 17일
음 진짜 전세를 할지 매매를 할지는 항상 고민이 되는거 같아요 ㅠㅠ. 진짜 없으면 월세살아야죠
무슈 · 2025년 9월 17일
뭐든 계약서는 꼼꼼히 봐야합니다
아아정복 · 2025년 9월 17일
계약서는 신중히 봐야합니다
치킨 · 2025년 9월 17일
요즘 전세가 매물이 없기도 하고 전세 사기때문에 정말 조심해서 골라야 하기는 한데 ..
무슈 · 2025년 9월 18일
계약서는 항상 신중해여합니다
베키 · 2025년 9월 18일
부동산 계약 중 나타난 미묘한 인간관계. 작은 배려가 뭉클한 감동을 주네요.
호잇 · 2025년 9월 19일
음 아무래도 .. 고민이 많이 되셨을거 같아요 ㅎㅎ 중도금을 내주셨다니 대단하네요
미니멀부자 · 2025년 9월 20일
아무래도.. 어떻게든 연결되어서 아는 관계라면 비교도 하게되고.. 씁쓸할거 같긴하네요
베테랑킴 · 2025년 9월 20일
난감해 하던 매수인에게.. 잘해주셨으니 보답하시는 모습도 좋네요
말차우유 · 2025년 9월 20일
양콩님 올려주신 글을 읽을 때마다 느끼는 거지만 참 별별 사람이 다 있는 것 같습니다. 부동산 거래를 하면서 학연을 엮는 건 또 처음 듣네요.
스위티자몽 · 2025년 9월 20일
매도인이 하필 매수인의 와이프 고등학교 동창이었다니.. 세상이 참 좁긴 좁네요. 이런 것도 인연인지.. 중개사님의 배려가 매수인의 걱정을 덜어주셨군요.
아아정복 · 2025년 10월 2일
와 진짜 동창이였다니 신기하면서도 세상 참 좁네요
무슈 · 2025년 10월 2일
세상 그래도 살만 한거같네요 ㅎ
와사비 · 2025년 10월 11일
제일이라고 생각하니 진짜 미묘한 감정이 들었을 거 같네요 ㅎㅎ
새우깡 · 2025년 10월 11일
모든 일에 다 적용되는 거 같아요 사람 마음이라는 게 아는 사람일이면 ㅎㅎ
청라룡 · 2025년 10월 23일
씁쓸하기도 하면서..오히려 아는 관계라 더 어려웠을것 같아요ㅎㅎ 중도금을 내주신 배려가 뭉클하네용
도기몬 · 2025년 10월 24일
감동적이면서도 씁쓸한 사연이네요.. 고마우면서도 입장이 어떨지 이해가 되는 것 같기도 해요.. ㅠ
박하맛 · 2025년 10월 26일
그놈의 학연 혈연 지연은 어디든 있죠?
근데 막상 본인이 받으면 좋은 속마음.....
그래도 남이 받으면 속상해요 ㅠㅠ
하..저 땐땐한 분위기 글로만 읽어도 불편하네요
포근포근쿠키 · 2025년 11월 13일
계약서 작성은 진짜 신중해야 하고 공증도 받아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함께 보면 좋은 글
그 계약서 절대 못 써준다니까요!
양콩23. 08. 31.

[서울 내집마련] 4. 난생 처음 부동산 매매 계약서 쓰던 날, 계약 후 마음가짐
리소26. 06. 18.

오늘 매도 계약서 쓰고 왔는데 자식 이민보낸 기분ㅠ
카트리나23. 10. 2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