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파트사우루스

나의 영원한 'XXX'

양콩읽는 데 약 4

오전 11시에 전세계약이 있었다.

며칠 전 계약 시간을 잡고부터 마음이 영 불편했다. 밤새 뒤척뒤척 했다.

임대인 K씨한테 일종의 트라우마가 있는 상태였기 때문이다.

6년 전.

웬 뾰족하게 생긴 젊은 총각(이하 K씨)이 월세를 놔달라며 시세를 물었다. 요즘 잘 안 나간다 했더니 빨리 놓으려면 얼마면 되냐 해서 '10만원 정도 싸게 조정해주면 된다'고 했더니 흔쾌히 그러라고 했고 마침 월세 임차인이 구해졌다. 함께 만나서 기분좋게 계약을 진행했다.

그러나 1주일쯤 후 임대인 K씨가 전화해서는

"다른 부동산에 알아보니 월세를 너무 싸게 놨다던데요?

부동산이 그렇게 남의 집을 헐값에 계약시키면 어떡합니까?"

고 막 화를 냈다.

어이가 없어서...'요즘 시세가 그래서 다른 집들도 비슷한 금액대에 계약되고 있다, 그렇게 놓으라고 하지 않으셨냐'고 해도 '기분 나쁘다! 다른 부동산에서 더 받고 계약할 거니 계좌번호를 대라 계약금을 돌려주겠다'고 난리난리를 쳤다.

일단 계약을 해제하려면 배액배상을 해야 한다고 해도 '부동산이 시세보다 싸게 놓은 것이니 배액배상을 하려면 부동산이 해줘라... 내가 싸게 놓으라고 해도 부동산이 시세대로 받아줘야 하는 게 아니냐'

다음날 갑자기 날센돌이같은 남자가 들이닥치더니 책상 위에다 계약금 봉투를 집어던지고 휙 돌아서 가버렸다.

순식간에 벌어진 일에 앗 소리도 못 낸 상황.

임차인을 불러 상황을 설명했더니 다행히 선하신 분이라, '계약 때 서명 날인하고 나서 이제 와서 말 바꾸는 주인이라면 나도 그런 집에서 살기 싫다, 다른 집으로 알아봐달라' 해서 고맙게도 마무리가 되었다.

그뒤 나는 이런 막무가내는 처음이라 고객명부에다 'XXX' 라고 적어놓고 다시는 저 집을 중개하지 말아야지! 굳은 맹세(?)를 했다.

그렇게 4년 쯤 지난 후 이 K씨가 전화를 해서 자기집을 매매나 전세로 빼달라는 의뢰를 했다. 전화벨이 울리자 고객정보 화면에 '0동 0호 XXX' 라고 떴다. 나는 중개보조원한테 말했다.

"그 집 뺄 생각 마세요. 집주인이 아주 진상이에요.

돈 던져놓고 갈 때는 언제고 왜 또 우리한테 집을 내놓았지?"

그런데 K씨가 자꾸 전화하더니 미리 이사 나간다고 키번호까지 알려주었다. 전세가도 시세보다 낮게 내려놓았다. 중개보조원이 미리 집을 한번 보고 오더니 올수리에 너무 좋다고 누가 한번 보면 바로 계약할 것 같다고 했다.

나는 그래도 신경 끄라 했다. '그 사람 나중에 딴소리 할지도 몰라!'

조건이 좋으니 어느 부동산이 계약했겠지 하던 어느 날 마침 급한 손님이 있어 혹시 집 계약됐냐고 전화했더니 K씨가 말했다.

"그렇게 말씀하시면 섭섭합니다. 저 거기밖에 안 내놨습니다."

어라~~ 왜??

아무튼 집을 보았고 손님이 보자마자 너무 마음에 든다고 하여 계약 시간을 잡게 된 것이다. 그런데 안 좋은 기억이 있다 보니 영 마음이 안 편하고 K씨를 만나는 것도 안 내켰다.

드디어 계약 날, 모두 모여 앉은 틈에서 나는 내 눈을 의심했다.

이 K씨가 그 K씨인가?? 등기부를 확인해도 분명 소유권 변경 이력이 없고 전화번호도 예전 그 XXX 번호인데...다른 사람같이 얼굴도 너무 잘 생겨져 있고, 임차인이 어떤 조건을 걸어도 다 받아주고 배려해주는 것이 아예 딴사람 같았다.

계약이 끝나고 모두 돌아간 후에 K씨는 음료수 박스를 사가지고 와

"고생하셨습니다. 감사합니다"

라며 꾸벅 인사했다. 그리고 몇 분간 서로 눈이 마주쳤다.

아마 그 몇 분 후에 내가 그를 보며 처음으로 웃었던 것 같다.

계약 시간이 잡힌 순간부터 은근 스트레스를 받고 있던 게 보였던지, 그날 계약이 끝난 후 중개보조원이 물었다.

"임대인 너무 성격도 좋고 쿨한테 왜 그리 걱정하셨어요?"

곰곰 생각해보니...4년 전과 달리 K씨가 많이 바뀐 듯 했다.

일단 결혼을 해서 7개월 된 아들을 안고 왔는데,,,,와이프가 보기에도 후덕한 인상에 웃음이 끊이지 않고, 늦게 본 아들이라 그런지 K씨가 아이에게서 눈을 못 뗐다.

또 생각해보니 고객들 명부를 엑셀화일로 정리해서 1년에 두번 명절 때 문자메시지를 보내고 있는데, 그에게도 문자메시지가 해마다 전송됐을 것이다. 가끔 생각나면 그 'XXX' 번호는 삭제했어야 하는데...으구...하며 이불킥을 했다.

그저 미처 삭제하지 못해서 발송된 문자메시지가, K씨에게 어떤 '느낌' 이 되었을까?

세월과 가정, 아들이 K씨의 뾰족했던 가치관을 변화시킨 게 아닌가...

그렇게 여러 삶의 과정을 거치면서 날카로웠던 인상마저 달라진 K씨는, 4년 전의 일이 미안했던지 파격적인 조건으로 집을 내놓고도....공실로 비워두면서까지 내가 계약하기를 기다려준 듯하다.

나는 고객정보 란의 "XXX"를 "KOO" 으로 수정했다.

사람 참 안 변한다고 생각했는데,

가끔 변하는 사람도 있다고 흐뭇해하면서 말이다.

그리고 다시 2년이 흘렀다.

K씨 집에 입주한 임차인이 1년 정도 살았을 무렵, K씨가 전화해서 집을 팔아달라고 했다. 아주 가볍게 시세를 물어보고 팔면 좋겠다는 의사표시 정도였다. 그런데 임차인은 만기까지 거주하길 원했고 당시 거래 분위기상 임차인 승계 매매로는 진행이 잘 안되었다.

그렇게 몇달이 흐른 어느 날 아침 출근길에 K씨의 질책성 전화를 받았다.

"제가 중개사님한테 집을 팔아달라 했는데 신경을 안 써줘서 손해를 어마어마하게 봤어요!"

"네? 무슨 손해요?"

"중개사님께 처음 매도 의사를 밝혔을 때 집이 바로 팔렸다면, 요즘 뜨는 신도시쪽에 집을 살 수 있었을 거고 그러면 2억이 넘게 벌 수 있었을텐데 대표님이 신경 안 써줘서 무지막지하게 손해를 봤다고요! "

하면서 마구 화를 내더니 전화를 끊었다.

헐~ 팔 수 있는데 안 판 것이 아니라 세입자가 이사를 못 나가겠다고 하니 조건에 맞는 매수자를 찾을 수 없었던 것인데 이렇게 화를 내다니.

그리고 다시 1년이 흘러 전세 만기 시점이 왔다. 세입자가 계약갱신요구권을 안 쓰고 이사나가겠다고 하여 K씨에게 전달한 후 매매를 진행하기로 하였다.

매수하겠다는 사람이 나타나서 K씨와 가격조율을 한 후 계약 시간을 잡았다. 그런데 계약 시간보다 1시간 먼저 나타난 K씨가, 출입 문을 열어제끼더니 그 자리에 선채로 말했다.

"중개사님 때문에 제가 손해 어마어마하게 본 거 기억하시죠? 손해배상 청구할까 하다 겨우 참았어요!

1시간 후에 매매계약을 진행하시려면 제가 입은 손해액을 중개사님이 배생해주세요! 그러지 않으면 저는 이 매매계약을 진행할 생각이 없어요!"

속사포처럼 얘기하더니 문을 쾅 닫고 사라졌다.

는 역시 생각이 짧다.

사람은 쉽게 안 변하는데 한 번의 변화로 그가 바뀌었다고 착각을 한 것이다.

사람은 안 변한다. 그러니 한 가지를 보면 열 가지를 안다는 말도 변함없는 진리다.

잠깐의 말, 순간의 변화에 현혹되지 말고 애초부터 인성이 바른 사람인지 아닌지를 정확히 판단했어야 하는 것이다.

나는 다시 고객 장부의 K씨를 'XXX'로 변경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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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 21

  • 키득 · 2025년 5월 21일

    ㅋㅋㅋk씨 대단한 사람이네

  • 풀코스 · 2025년 5월 21일

    뭐야 글 너무 재밌잖아요 ㅋㅋㅋㅋ

    썸네일 진짜 잘뽑앗다 ㅋㅋㅋ

  • 준필아밥은먹고다니냐 · 2025년 5월 21일

    사람 절!!!~~~~~~대 안바뀌죠

    잠깜 착하게 보였다고 믿었다간 큰코다칩니다

    기록 남기고, 감정 없이 대응해야해요

  • 머니트리 · 2025년 5월 21일

    임대인 입장에서는 억울했을수도요 ㅜ 감정적으로 대응안하고 침착하게 버텨낸게 대단하십니다!

  • 대부호시대 · 2025년 5월 21일

    물론 세입자는 시세보다 비싸게 계약했다고 느꼈을수도 있겠죠 다만 그렇게 생각했으면 애초에 계약 전에 확실히 확인했어야죠

  • 파죽지세 · 2025년 5월 21일

    저도 ㅋㅋㅋㅋㅋㅋㅋ 재밌게 읽었어요 글빨 무엇 ㅋㅋㅋㅋㅋ 저 글에서 킬포인트는 신도시쪽에 집을 샀으면 2억 넘게 벌었을건데 너때문에 못햇다임 ㅋㅋㅋㅋㅋㅋㅋㅋ 퐝당 그잡채네

  • 각지사랑 · 2025년 5월 21일

    이래서 계약도 사람관계도 다 증거 중심으로 흘러가야해요ㅜ 살면서 뼈저리게 느끼죠

    구두 약속은 의미 아예 없고 문서화나 녹취 캡쳐가 무조건 필수인 시대랍니다 ㅜ

  • 평화주의자 · 2025년 5월 21일

    그래도 끝까지 원칙 지키고 선하게 마무리하신 모습 인상깊어요

    세상엔 별사람 다 있네요...

  • 팔로우미 · 2025년 5월 21일

    k씨 와그러는교? 어디 나사 풀렸는교? 어따가 화를 내는거야 ㅋㅋ

  • 행복하자 · 2025년 5월 23일

    그 사이에 이혼한거 아니에요?

    아내가 애 데리고 나간걸수도

  • 자연그대로 · 2025년 5월 23일

    해피엔딩인줄 알고 현실성이 떨어진다고 생각했는데 마지막 반전을 보니 후덜덜입니다. 진짜 사람은 절대 안변한다는게 맞는듯

  • 뉴글 감평사 · 2025년 5월 23일

    아 뒷목을 잡게 만드는.... 후웁

  • 사자부동산 · 2025년 5월 23일

    아이쿠야 실무에서 감정고생이 많으십니다.

  • 마라 · 2025년 5월 23일

    기회비용 ㅋㅋㅋㅋㅋㅋㅋㅋ

  • 집좀사자 · 2025년 5월 24일

    글 정말 읽을 때마다 느끼는 거지만 참 재미있게 잘 쓰시는 것 같습니다. 이상한 사람들도 참 많군요. 어떻게 보면 감정노동이 참 심한 직업인 것 같기도 하네요.

  • 나안아... · 2025년 5월 25일

    이랬다 저랬다 인격이 두개인가요,,,진짜 별 미친사람 다 보네용,, 전 좋은 쪽으로 끝나는줄 알았더니만 이런 미치광이가ㅜㅜ고생많으셨어용ㅠㅠㅠ역시 사람은 쉽게 안변하나바용,,

  • 웃으면된다고생각해 · 2025년 5월 26일

    진짜 어이가 없넼ㅋㅋㅋㅋㅋㅋ별미친사람을 다보겟네 보살이심 진짜 23아이덴티티도 아니고 이랫다저랫다 병잇는거아님???

  • 우린깐부 · 2025년 5월 27일

    어머~~ㅋㅋ정신병자 아닌가요???무슨 이런일이 다있는지~제가 글쓴님이었으면 못참았을것 같은데 인내심 대단하셔요~~^^ㅋㅋㅋ

  • 푸른빛 · 2025년 6월 1일

    미.친.사.람

  • 아기새 · 2025년 9월 26일

    진짜 이상한 사람이네요 .. 저라면 절대 못 참을거 같아요 .. 저런 경우가 다 있나요 이상한 사람 많아요

  • 호잇 · 2025년 11월 11일

    헐 ... ㅋㅋㅋ 아니 이런 사람도 다있네요 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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