계약과 잔금 사이의 두 얼굴
양콩읽는 데 약 2분
"중개사님 덕분에 집이 빨리 팔려서 정말 다행이에요. 고마워요."
지난 7월 계약서를 쓰고 돌아서던 박 여사의 얼굴에는 안도감이 가득했다.
분양아파트 10월 입주를 앞두고 잔금 걱정에 밤잠을 설치던 그녀였다.
당시 우리 지역은 인근 신도시 입주 물량이 대량으로 쏟아질 때마다 주변 아파트 가격이 하락하는 현상이 반복되었다. 부동산은 수요와 공급의 영향을 많이 받기 때문이다. 기존 집이 제때 팔리지 않거나 기대한 가격을 받지 못해 잔금을 맞추지 못하는 수분양자들도 적지 않았다.
그런 상황에서 기존 집을 적당한 가격에 내놓은 박 여사는 운 좋게도 삼박자가 맞는 매수인을 만났다. 덕분에 가장 큰 걱정거리였던 잔금 부담을 덜 수 있게 되었다. 이 집을 처분해서 분양아파트 잔금을 치러야 하는 사정을 알기에 은근히 부담되고 걱정스러웠던 나 역시 내 일처럼 기뻤다.
하지만 부동산 시장의 향방은 누구도 예측할 수 없다.
10월 입주 시점이 다가올수록 예상과 달리 쏟아질 줄 알았던 매물은 거짓말처럼 자취를 감추기 시작했다. 분양가가 높은 신축보다 상대적으로 저렴한 구축 아파트를 찾는 수요가 늘면서 오히려 가격이 반등하는 현상이 나타난 것이다.
불안은 인간의 판단을 흐리게 하고, 탐욕은 이성을 마비시킨다.
잔금을 고작 사흘 앞두고 박 여사에게서 전화가 왔다.
"집을 너무 싸게 팔았어! 그때 내가 잘 몰라서 싸게 판다 해도 중개사님이 알아서 더 받아줬어야지.
억울해서 잔금 날짜에 못 가겠으니까 알아서 해!"
이미 적법하게 체결된 계약이었고, 시장의 변동은 누구의 잘못도 아니었다. 그럼에도 그녀는 막무가내였다.
상식 밖의 상황이었지만 계약을 무사히 마무리해야 하는 것이 중개사의 숙명이라 달래고 또 달랬다.
부모님을 가까이 모셔 돌볼 계획이었던 매수인은 갑작스러운 상황에 당황했다. 부모님의 거처 마련이 틀어질 수 있다는 걱정에 결국 위로금 명목으로 1,000만 원을 추가 지급하겠다고 제안했다.
계약 이후 시세가 올랐다고 돈을 더 주겠다는 결정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하지만 당시 시세가 이미 5,000만 원가량 오른 상황이었기에 매수인은 큰 결단을 내렸다.
드디어 잔금 날.
추가 금액까지 지급되었으니 원만히 마무리될 줄 알았다. 그러나 사무실 안의 공기는 내내 싸늘했다.
거래가 진행되는 동안 박 여사는 팔짱을 낀 채 입술만 씰룩거렸다. 그리고 모든 서류 절차가 끝나자마자 기다렸다는 듯 나를 향해 손가락을 치켜들었다.

"남의 집을 이렇게 싸게 팔아먹어? 아주 못된 X이야!"
순간 내 귀를 의심했다.
시장이 얼어붙었을 때 발을 동동 구르며 걱정하던 그녀를 위해 동분서주했던 시간들이 머릿속을 스쳐 지나갔다. 옆에 있던 딸이 질겁하며 엄마의 입을 틀어막고 밖으로 끌고 나갔다. 딸은 연신 내게 고개를 조아리며 죄송하다고 말했다.
중개사인 내가 집을 헐값에 사들인 것도 아니었다. 몇 달 전 시세에 맞춰, 그녀가 원한 금액을 최대한 맞춰 계약을 성사시킨 것뿐이었다. 그런데 몇 달 뒤 집값이 올랐다는 이유로 가슴을 후비는 비난의 총을 맞아야 했다.
딸한테 끌려 멀어지는 그녀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문득 이런 생각이 들었다.
계약할 때보다 잔금 때 집값이 오르면 나는 못된 X이 되는 걸까. 그렇다면 반대로 계약 이후 집값이 폭락했다면 나는 좋은 중개사가 되었을까. 그렇다면 매수인에게는?
부동산 중개업을 하며 수많은 인간 군상을 만난다.
돈이라는 거대한 욕망 앞에서는 어제의 은인이 오늘의 원수가 되기도 하고, 고마움의 눈물이 순식간에 원망의 삿대질로 바뀌기도 한다.
사람은 종종 자신이 내린 선택의 책임을 스스로 감당하기보다, 결과가 마음에 들지 않을 때 대신 원망할 대상을 찾는다. 하지만 시장의 상승과 하락은 중개사의 영역이 아니다. 중개사는 그저 그 시점의 시세와 시장 상황을 설명하고, 각자가 내린 판단이 합의에 이르도록 돕는 사람일 뿐이다.
대통령도 집값을 마음대로 움직이지 못한다.
정부가 강력한 부동산 정책을 내놓아도 시장은 예상과 다른 방향으로 흘러가기도 하는 것이니까. 하물며 중개사가 미래의 집값을 맞출 수 있을 리 없다.
결국 최선의 판단은 할 수 있지만, 결과까지 선택할 수는 없다.
그러니 일이 생각대로 잘 풀리면 운이 좋았다고 생각하고, 기대와 다른 결과가 나오면 그것 또한 받아들일 줄 알아야 한다. 좋은 경험으로 남기고 다음 판단의 자양분으로 삼으면 된다.
계약과 잔금 사이 몇 달 동안 집값은 오르기도 하고 내리기도 하지만,
어쩌면 그 짧은 시간 동안 가장 크게 변하는 것은 집값이 아니라 사람의 마음인 것같다.
댓글 13
눈사라밍 · 2026년 6월 17일
어머..내 집을 팔때든 살때는 사람을 잘 만나야될것같은..
도레미 · 2026년 6월 17일
말씀처럼 정말 그 누구도 예상할 수 없는 것 같아요 ㅠㅠ 그리고 너무 격하게 공감합니다...너무너무 다른 두얼굴.....들어갈때와 나올때 다르더라구요 ㅠ
하놩 · 2026년 6월 17일
진짜로 저러면 곤란할 것 같아요ㅜㅜ사람마음이 휙휙 바뀐다지만 그걸 표출하는것 또한...어렵네요
송이송2 · 2026년 6월 17일
와 그러면 계약할 때 그 지역 상권 정보는 잘 알려줬던 건가요 개인적으로는 생활 인프라가 좋으면 교통이 아무리 좋아도 좀 애매하게 느껴질 수 있을 것 같아서 가격도 궁금하네요.
껄껄껄 · 2026년 6월 18일
누가 부동산 시세를 예측하고 거래를 할까요 부동산이라는게 예상치 못한 결과가 나오더라도 계약시점에 따라 받아들여야하는데 욕심이라는게 어쩔 수는 없지요 하지만 그게 중개인의 잘못도 아니고요
효쥬님 · 2026년 6월 18일
진짜 예상하기 힘든 부분이 많은데, 애매하기는 하네요.. 그래서 더 공감되는 부분이기도 합니다.
포근포근쿠키 · 2026년 6월 18일
계약할 때 자세하게 알려준 게 많고 친절하고 좋은 분이라면 인정, 근데 그게 아니다? 그러면 진짜 내기 싫을 것 같은데..
멍보리 · 2026년 6월 18일
와 저기 전에 뭐 들어온다 하지 않았나 청약이랑 관련된 게 있었던 것 같은데 잘 기억이 안 나네 사람들이 저 상황에서 뭘 느낄지 궁금함 솔직히 힘든 결정인 거 맞지
시온라온맘 · 2026년 6월 18일
내 친구도 비슷한 상황 겪었었음... 그때 진짜 힘들어 했다고 하더라구 주변에서 집값 오르니까 자꾸 불안해하고 잔금 준비할 생각에 눌려서 고생했음 특히 팔아야 하는 집이 제때 잘 팔리지 않으면 더 스트레스였던 것 같음 그래도 잘 마무리 돼서 다행이긴 했음 사람 마음이 진짜 잘 변하는 것 같음...
어느여름 · 2026년 6월 19일
"가장 크게 변하는 것은 집값이 아니라 사람의 마음"이라는 마지막 문장이 긴 여운을 남기네요👍 시장의 변동은 누구의 잘못도 아닌데 본인의 선택을 남 탓으로 돌리는 인간 군상을 보며 중개업이 참 보통 일이 아니라는 걸 다시금 느끼네용
도로롱 · 2026년 6월 19일
아니 진짜 황당하네요 ㅋㅋㅋ 잘 안팔릴때는 어떻게든 팔아달라고 하던 사람이 시장성 때문에 어쩔 수 없이 변동한걸 내 채ㅐㄱ임을... 진짜 너무 화나네요 ㅠ
호잇 · 2026년 6월 23일
사람의 마음이 가장 어렵습니다 .. ㅎㅎ 알수가 없는게 사람 마음이에요
브라키오 · 2026년 6월 27일
진짜 읽으면서도 열받네요.. 사람 마음이 화장실 들어갈때랑 나올때 다르긴 하다지만.. 하.. 정말 힘든 문제인거같아요..
함께 보면 좋은 글
세상에서 가장 무서웠던 매매 잔금
양콩25. 05. 06.

이주비·잔금·전세 다 막힌 재개발·재건축…어떻게 될까
Mr.리퍼비시먼트25. 07. 06.

잔금 시간은 돈 주는 시간이 아니에요!
양콩25. 04. 23.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