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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에서 가장 비싼 우편번호: 베버리 힐스 90210

엘레이맘읽는 데 약 3

유럽의 성당같은 느낌을 주는 베버리힐스 시청 건물

Beverly Hills, 90210

1990년, 미국에는 한 드라마가 등장했다. 제목은 'Beverly Hills, 90210'.

당시 이 드라마는 전형적인 청춘 드라마였다. 금발의 십대들이 거대한 저택에서 파티를 열고, 스포츠카를 몰고 다니며 사랑과 우정을 이야기한다. 그런데 많은 사람들이 궁금해했던 건 이야기보다도 제목 끝에 붙은 숫자였다.

90210.

전화번호도 아니고, 학교 번호도 아닌 것 같은 이 숫자는 도대체 무엇일까?

나 역시 어린 시절 텔레비전을 보며 같은 궁금증을 가졌던 기억이 있다. 그냥 드라마 제목이 특이한가 보다 하고 넘겼는데 수십 년이 지나서야 알게 됐다. '90210'은 바로 우편번호(ZIP code)였고 그 숫자가 가리키는 곳은 세계에서 가장 유명한 부촌 중 하나인 'Beverly Hills'다.

미국에서 우편번호는 단순히 편지를 배달하기 위한 숫자가 아니다. 다섯 자리 숫자만 들으면 미국인들은 대략적인 그림을 그린다. 어떤 동네인지, 집값이 어느 정도인지, 아이들이 어떤 학교에 다니는지까지 말이다.

한국에서 누군가 “어디 사세요?”라는 질문에 “래미안”이나 "자이”라고 답하는 순간 머릿속에 주거 환경이 자동으로 그려지는 것처럼, 미국에서는 우편번호가 그 역할을 한다. 예를 들어 '10021'은 '뉴욕 맨해튼 어퍼 이스트 사이드'를, '33109'는 '마이애미 피셔 아일랜드'를 의미한다. 그리고 LA에서는 단연 '90210'이다. 이 숫자는 단순한 우편번호가 아니라 미국에서 가장 비싼 주소 중 하나를 상징하는 코드가 되었다.

전세계 명품관 집결지 로데오 드라이브

할리우드가 만든 도시

'Beverly Hills'는 처음부터 이런 명성을 가지고 있었던 곳은 아니다. 20세기 초만 해도 이곳은 목장과 야자수가 있는 조용한 교외 지역이었다. 그러나 할리우드 영화 산업이 성장하면서 상황이 바뀌었다. 영화배우와 제작자들은 LA 도심에서 가까우면서도 조용하고 고급스러운 주거지를 찾기 시작했고, 그 선택지가 바로 베버리 힐스였다.

스타들이 하나둘 이곳에 집을 짓기 시작하자 자연스럽게 고급 호텔과 상점들이 들어섰다. 그 중심에는 세계적으로 유명한 명품 거리 'Rodeo Drive'가 있다. 지금 이 거리를 걸어 보면 구찌, 프라다, 루이 비통, 샤넬 같은 브랜드 매장이 마치 궁전처럼 늘어서 있다. 로데오 드라이브는 이제 단순한 쇼핑 거리가 아니라, 세계적인 럭셔리 브랜드가 자신들의 존재감을 과시하는 하나의 무대가 되었다.

여기에 'Beverly Hills Hotel'과 'Beverly Wilshire Hotel' 같은 상징적인 호텔들이 더해지면서 이 동네는 영화 속 장면 같은 도시가 되었다. 영화 '프리티 우먼'에서 줄리아 로버츠가 쇼핑을 하던 장면도 바로 이 거리에서 촬영되었다.

탑티어급 시설을 갖춘것으로 유명한 베버리힐스 고등학교

LA 안에 있지만 LA가 아닌 도시

베버리 힐스가 더 흥미로운 이유는 따로 있다. 지도만 보면 LA 한가운데에 있는 것처럼 보이지만, 사실 이곳은 Los Angeles 시에 속하지 않는 독립 도시다. 1914년부터 완전히 분리된 도시로 운영되고 있으며 경찰, 교육, 세금, 도시 규제까지 모든 것이 자체 시스템으로 돌아간다.

치안은 'Beverly Hills Police Department(BHPD)'가 담당하고 교육 역시 'Beverly Hills Unified School District(BHUSD)'라는 독립 학군이 운영한다. 대부분의 LA 지역이 속한 'Los Angeles Unified School District(LAUSD)'보다 학업 성취도와 대학 진학률이 높은 것으로 평가된다.

도시 관리 규정도 매우 엄격하다. 집 앞마당 조경, 외벽 색상, 울타리 디자인, 심지어 잔디 종류까지 시의 허가를 받아야 한다. 개인의 집인데 왜 이렇게까지 규제할까 싶지만, 이곳에서는 철학이 분명하다.

동네 전체를 하나의 명품 브랜드처럼 관리한다는 것이다.

외부인은 접근 불가한 베버리힐스의 프라이빗 럭셔뤼 하우스

부자들이 모이는 또 하나의 이유: 세금

부동산 시장에서는 세금도 중요한 변수다. LA 시에서는 고가 주택 거래 시 'Measure ULA'라는 이른바 ‘맨션세’가 적용된다.

500만 달러(약 74억 5천만 원) 이상 거래 → 약 4%

1,000만 달러(약 149억 원) 이상 거래 → 약 5.5%

하지만 베버리 힐스는 LA 시가 아니기 때문에 이 세금이 적용되지 않는다. 고가 부동산 거래가 많은 지역에서는 상당한 차이가 되는 부분이다. 또한 이 도시에서 걷힌 세금의 상당 부분은 치안, 교육, 공원 관리 등 지역 인프라에 다시 투자된다. LA시 주민들은 세금 일부가 county나 state로 빠져나가 분산되는 구조라, "내 돈이 내 동네에 쓰인다"는 느낌이 덜한 반면 베버리 힐스 주민은 그 체감이 분명하다.

이러한 구조 덕분에 베버리 힐스는 단순한 부자 동네가 아니라 자치권으로 완성된 프라이빗 럭셔리 도시가 되었다.

90210이라는 다섯 자리 숫자

베버리 힐스 안에서도 가장 선호되는 지역은 ‘The Flats’라 불리는 평지 구역이다. 선셋 불러바드와 산타모니카 불러바드 사이에 위치한 이 지역의 주택 가격은 보통 '1,000만 달러(약 149억 원)' 이상에서 시작한다.

북쪽 언덕 지역인 'Trousdale Estates'는 현대적인 건축과 탁 트인 전망으로 유명하다. 이곳에서는 '4,500만 달러(약 670억 5천만 원)'를 넘는 초호화 부동산도 흔히 볼 수 있다.

콘도나 소형 주택은 '100만~200만 달러(약 14억 9천만~29억 8천만 원)' 수준에서도 찾아볼 수 있지만, 90210 중심 지역의 주택들은 대부분 수백만 달러 이상이다.

삶 자체가 명품 브랜드와 다를바 없는 90210

결국 부동산은 ‘주소’를 사는 것

부동산을 보다 보면 문득 이런 생각이 든다. 우리는 집을 사는 게 아니라, 주소를 산다는 거.

'베버리 힐스 90210'이 바로 그걸 가장 선명하게 보여주는 예시다. 다섯 자리 숫자에 불과한데, 그 안에 할리우드의 역사, 로데오 드라이브의 화려함, 철저한 자치 시스템, 최고급 학교들, 그리고 수백억 원대 부동산 가치가 다 들어 있다.

그냥 우편번호가 아니라, 하나의 완성된 '라이프스타일 코드'인 셈이다. 어린 시절 '베버리 힐스 90210'을 보며 궁금해하던 그 숫자. 그때는 그냥 드라마 제목 끝에 붙은 멋진 장식처럼 느껴졌는데, 지금 와서 보니 그건 이미 오래전부터 세상이 인정하는 “여기 사는 순간, 삶의 레벨이 달라진다”는 상징이었다.

사진 출처 : Google 이미지

댓글 1

  • 나나나 · 2026년 3월 13일

    “부동산은 결국 주소를 사는것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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