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만 원어치는 편하게 드세요!
양콩읽는 데 약 3분
"이제부터 10만 원어치는 그냥 편하게 드셔도 돼요. 돈 내지 마요."
늘 가던 동네 식당에서 점심을 먹고 계산을 하려는데, 주인아주머니가 내 손을 쇠뿔 잡듯 만류하며 슬쩍 웃었다. 무슨 영문인지 몰라 동그란 눈초리로 아주머니를 바라보았다.
"네? 그게 무슨 말씀이세요?"
이야기는 몇 달 전, 매서운 칼바람이 불던 한겨울로 거슬러 올라간다.

20평대 아파트에 살던 영주 씨는 아이들이 커가면서 넓은 집이 필요했다.
30평대 매물을 보러 몇 번이나 사무실을 들락거리더니, 마침내 마음에 드는 집을 찾아 매매계약을 하겠다고 나섰다. 대신 지금 살고 있는 집은 월세로 놓아달라는 조건을 붙였다.
인근 신도시의 입주 폭탄 때문에 전세도, 월세도 도통 나가지 않는 혹독한 불경기였다. 살던 집이 제때 빠지지 않으면 잔금 날 낭패를 볼 게 뻔했다. 나는 걱정스러운 마음에 영주 씨에게 몇 번이나 확인했다.
"지금 살고 있는 집이 계약되고 잔금이 들어와야 이 집 잔금을 치를 수 있는 거예요? 지금 시장이 워낙 얼어붙어서 기일 맞춰 빼준다고 장담을 못 해요."
영주 씨는 흔쾌히 그 정도는 괜찮다며 자신만만해 했다. 따로 융통할 곳이 있구나 싶어 마음 편하게 계약서를 썼다.
그런데 일주일쯤 지났을까. 영주 씨가 양손에 커피 두 잔을 들고 와서 조심스럽게 말을 꺼냈다.
"집이 빨리 안 나갈까요? 잔금 못 맞추면 어떡하죠?"
잔금은 다 준비되어 있다고 하지 않았느냐고 되물으니, 돈이 나올 곳이 있었는데 일정이 조금 미뤄질 수도 있어서 해본 소리란다.
원래 무모한 계약은 받아들이지 않는 내 성격상 덜컥 부담이 밀려왔다. 월세 계약만 너무 믿지 말고 돈을 꼭 미리 맞춰보라고 신신당부했고, 그녀는 알겠노라 답했다.
사건은 잔금 하루 전날 늦은 오후에 터졌다. 수화기 너머로 영주 씨의 다급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사방팔방으로 뛰어다녀도 돈을 마련할 수가 없어요. 친구가 그러던데, 이럴 땐 부동산에서 돈을 좀 빌려주기도 한다면서요?"
기가 막혔다. 잔금을 하루 앞두고 돈이 안 된다고 하면 도대체 어쩌란 말인가. 아무 말이 없기에 다 준비된 줄 알았다고 다그치자, 수화기 저편에서 갑자기 훌쩍이는 울음소리가 새어 나왔다.
그녀는 고백했다. 시어머니와의 갈등으로 남편과 별거한 지 오래인데, 남편이 위자료조로 잔금을 보태주기로 해놓고선 갑자기 연락을 끊어버렸다는 것이다.
영주 씨는 울먹이며 2000만 원만 빌려주면 이자는 넉넉히 치러주겠다고 매달렸다.
평소 영주 씨가 얼마나 착하고 열심히 사는 사람인지 잘 알고 있었던 터라 모질게 거절할 수가 없었다.
"이자는 무슨... 일단 내가 2000만 원 대납해 줄 테니까 너무 걱정하지 마요. 그리고 무슨 배짱으로 하루 전날까지 입을 꾹 다물고 있었어요? 어떤 일이든 이렇게 처리하면 안 돼요!"
동네 언니처럼 혼을 내고는 전화를 끊었다. 속은 시끄러웠지만, 당장 길바닥에 나앉게 생긴 한 가족을 외면할 순 없었다.
다음 날 무사히 잔금을 치렀다. 영주 씨는 고맙다며 기어코 밥을 사겠다고 했다. 그렇게 해야 그나마 미안한 마음이 편해질 것 같아, 나도 못 이긴 척 고맙게 받아먹었다. 숟가락을 들던 영주 씨가 가라앉은 목소리로 말했다.
"빨리 집이 나가야 대납해 주신 돈을 돌려드릴 텐데……그냥 새로 산 30평대 집을 월세로 놓고, 저는 살던 집에서 계속 살까 봐요."
가슴이 아렸다. 자식들 좁은 방에서 키우기 미안해 큰맘 먹고 이사하는 걸 뻔히 아는데, 빌린 돈 2000만 원 때문에 새집을 비워두고 옛집에 눌러앉겠다니.
"좀 늦어도 되니까 그냥 30평대로 이사 가요. 나한테 돈 빌린 것 때문에 그러면 내가 마음이 아파서 안 돼. 그냥 이사 가요, 얼른."
내 말에 영주 씨는 대답 대신 고개만 푹 숙이고 있었다.
일주일 뒤 출근해 보니, 내 책상 위에 쇼핑백 하나가 놓여 있었다. 열어보니 손수 정성스럽게 담근 유자차와 모과차 한 병씩이 들어있었다.
바쁜 사람이 언제 이런 걸 다 만들었냐며 건성으로 고맙다 말하고 넘겼는데, 사흘쯤 뒤에 카톡이 왔다.
[너무 고마워서 맛있는 거라도 사 드시라고 쇼핑백에 조그만 봉투 넣어놨어요.]
그때서야 다시 쇼핑백을 들춰보니 진짜로 20만 원이 든 흰 봉투가 들어있었다. 나는 곧장 전화를 걸어 짐짓 호통을 쳤다.
"뭐 하러 이렇게까지 해요? 세상 너무 착하게 살지 마요! 이 돈은 나중에 집 월세 나가면 받을 중개보수에서 미리 깎아주는 걸로 할 테니까 그런 줄 아세요."
그렇게 한바탕 혼을 내며 넘겼는데, 다시 일주일 뒤에는 곱게 담근 김치 한 통이 아들 손에 들려 사무실로 배달되었다.
"왜 힘들게 김치를 담가 보내요? 세상 너무 바보같이 베풀고 살지 말라니까? 한 번만 더 이러면 진짜 집 안 빼줄 거예요!"
말은 뾰족하게 하면서도 김치가 너무 맛있어서 자꾸 손이 갔다. 그 뒤로도 퇴근길에 붕어빵이니 떡이니 참새가 방앗간 들르듯 간식을 챙겨다 주었다.
미안함과 고마움이 뒤섞인 영주 씨의 마음을 모르는 바는 아니었지만, 2000만 원 빌려주고 너무 과하게 얻어먹는 것 같아 슬슬 마음이 불편해지던 참이었다.

그런데 이제는 단골 식당에 점심값 10만 원을 미리 맡겨두기까지 한 것이다. 식당 아주머니 말로는 영주 씨가
'부동산 사장님이 알면 아주 불같이 혼내시니까, 제발 뒷탈 없게 비밀로 해달라'고 몇 번이나 신신당부를 하더란다. 기가 막혀 허탈하게 웃는 나에게, 식당 아주머니가 어깨를 툭 치며 달랬다.
"그냥 편하게 먹어. 네 돈 내 돈 따지지 말고 맛있게 먹어줘. 그게 저 사람 마음 편하게 해주는 유일한 방법이야."
생각해 보니 그랬다. 불경기라는 차가운 겨울 속에서, 영주 씨는 갚지 못한 돈에 대한 부채감으로 매일 밤낮 마음을 졸였을 것이다.
자신이 할 수 있는 가장 따뜻한 방식으로 내게 미안함을 갚아나가고 있었던 거다. 그녀가 건넨 유자차도, 김치도, 붕어빵도 모두 돈이 아니라 염치였고 마음이었다.
다행히도 10만 원어치 밥을 다 비우기 전에 얼어붙었던 부동산 시장이 조금씩 움직였다. 영주 씨의 집은 좋은 임자를 만나 월세 계약이 차질 없이 진행되었고, 대납했던 돈도 무사히 내 품으로 돌아왔다.
그 사이 유난히 길고 혹독했던 겨울이 끝나고, 어느새 따뜻한 봄 냄새가 날아오고 있었다.
세상은 이렇게, 세월도 이렇게 흘러간다.
댓글 19
하놩 · 2026년 6월 10일
따뜻해지는 사람사는 이야기 너무 좋네요 🙂 두분 모두 다 보기좋아요..
공간의가치 · 2026년 6월 10일
어떤일이든 사람사이에 신뢰가 정말 중요한 일이구나 싶습니다
결국 오래 가는건 실력이상으로 사람대하는 태도인 거같아서 뭉클해지네
팽오리 · 2026년 6월 10일
저번분들도 있구나 하는 생각이드네요ㅠㅠ제주변에선 겪어보지못한지라...신뢰가 역시 최고입니다..
눈사라밍 · 2026년 6월 10일
인복이라는게 괜히 있는게 아니라는 생각도 듭니다..
귤농장 · 2026년 6월 10일
이런 따뜻한 이야기는 언제 들어도 마음이 뭉클해지네요... 사람들 간의 배려와 신뢰가 참 중요하죠... 이렇게 훈훈한 분위기가 우리 동네에도 많이 퍼졌으면 좋겠어요...
신혼두두 · 2026년 6월 10일
아이구ㅠㅠ 눈물이 찔끔 나네요. 세상에 저렇게 따뜻한 사람이 있을까요...
어느여름 · 2026년 6월 11일
"돈이 아니라 염치였고 마음이었다"라는 문장이 가슴에 콕 박히네요.. 요즘 세상에 돈 2000만 원 빌려주기도, 또 그 고마움을 이렇게 눈물겹게 갚아나가기도 쉽지 않은데 두 분 다 정말 가슴이 따뜻한 분들이라 좋은 인연으로 남으신 것 같습니다.
효쥬님 · 2026년 6월 11일
좋은 사람이 많다는 건 아직 세상이 살만하다는 뜻이기도 하죠, 더 많은 사람이 좋은 사람이었으면 좋겠어요..
포근포근쿠키 · 2026년 6월 11일
이런 따뜻한 이야기는 뭉클하게 만들기도 하지만 나를 살아가게 만드는 것 같기도 해요~
레드벨벳 · 2026년 6월 11일
신도시가 들어서면서 교통은 많이 좋아진 것 같음 체 ㅎㅎ 근데 그게 다는 아닌 듯 함 특히 출퇴근 시간에 애매한 구간이 좀 있더라고요 도로가 넓어져서 전체적으로는 빨라졌지만 그 짧은 시간에 필요한 상권은 여전히 아쉬운 감이 있네 그래서인지 사람들이 명소 쪽으로만 몰리는 느낌도 드는 듯 함 뭔가 한 발 떨어져 보면 이럴 바엔 좋아진 교통으로 먼 데 나가게 되는 경우도 더 많은 것 같음 체 ㅎㅎ
서울초보 · 2026년 6월 11일
교통이 좋아졌다고는 하지만 진짜 필요한 건 그게 아닌 것 같음 ㅋㅋ 최근에 마트도 없어지고 장 보러 다니면 귀찮고 병원도 멀어지고 학원은 또 어떻게 되는지 아는 사람도 없고 ㅎㅎ 뭔가 이렇게 번잡해지면 주변 인프라가 더 중요해지는 듯 교통만 좋아진다고 다 해결되는 건 아닌 것 같아 체 ㅎㅎ
오렌지나무 · 2026년 6월 12일
ㄹㅇ 예전에도 그랬고 지금도 그렇고 부동산 시장은 항상 애매하긴 해요 그때 신도시 들어오는 소문 듣고 다들 좋아했는데 막상 가보면 뭔가 항상 부족한 게 있죠 교통은 좋아졌다고들 하는데 출퇴근은 여전히 힘들고 주변에 필요한 시설들은 진짜 애매해서 도대체 필요한 게 뭘까 싶어요 우리도 이렇게 하다가 전세가 안 맞는 상황이 생기면 다들 느끼는 시기인 것 같아요 그러고 보니 예전에 신도시 쪽에 대규모 개발한다고 하지 않았나 결론적으로 실질적으로 한 건 별로 없던 기억이 나네요 시장은 저런 이야기들로만 돌아가는 느낌이에요
껄껄껄 · 2026년 6월 12일
아직 이렇게 따뜻한 마음을 가진 분들이 있어서 살수 있는거 아닐까요? 부동산 시장이 어려워 별의별 사람도 많고 무리한 투자로 안좋은 소식이 들릴때도 있는데 부동산 시장이 빨리 좋아지면 좋겠네요
솔레임 · 2026년 6월 14일
이런 이야기가 뜨거운 반응을 불러올까 걱정입니다?? 고마움보다 부담이 더 커 보입니다.
무난무난이 · 2026년 6월 14일
이 글을 보니까 사람들 간의 정이 느껴지네요?? 그런데 이렇게 소중한 관계가 부동산 시장의 영향을 받을까요?? 그냥 사람 많고 잘 되는 동네에 투자하는 게 나을 것 같은데, 이런 상황에서도 고심하는 모습이 아쉽죠??
스위티자몽 · 2026년 6월 14일
돈도 돈이지만 절박한 순간에 내 편이 되어 혼내줄 수 있는 어른을 만났다는 게 영주 씨 인생의 가장 큰 복이네요.
말차우유 · 2026년 6월 14일
중개사님 성격 아니까 비밀로 밥값 맡겨둔 영주 씨 마음도 참 예쁘네요. 이런 게 진짜 주고받는 건강한 정인가 봐요.
호잇 · 2026년 6월 18일
엄청난 신뢰속에 가능한 일인거 같아요 ㅠㅠ 선뜻 내어주신 돈도 그리고 그걸 받는 사람의 마음도 너무 따뜻해지는 글인거 같네요
로렐라이 · 2026년 6월 27일
눈물 고이네요.. 이런 따뜻한 분들이 세상에 많았으면 좋겠어요..


